[격동의 한국 천주교 현대사-1]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원형인 4.19혁명이 일어난 4월부터 우리민족의 일제 식민지통치에서 해방을 맞이한 8월까지 한국현대사 안에서 교회의 자취를 굵직하게 더듬어 간다. 교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역사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격동의 시절을 보내온 교회를 통해 내일의 모습을 가늠하기 위함이다. -편집자 

한국가톨릭교회는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승만정권과의 긴밀한 협조관계 속에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명실상부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남한 교회가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당연히 “천주교회는 반공산주의 사상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세력”이라는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화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는데, 남한 천주교회는 1949년 8월 26일 <대한천주교연맹>을 결성한다. 대한천주교연맹은 노기남 주교를 총재로 하고, “사회 전부문에 걸쳐 가톨릭정신을 보급하자!”는 기치아래 전국의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남녀노소를 포괄하는 평신도 가톨릭운동 대표단체로 출범하였다. 이 단체가 성장하여 1968년 7월 23일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결성된다.

한편 주교회의는 반공전선의 선두에 서있는 천주교회의 이데올로기를 광범하게 유포하기 위하여 주교회의에서 관장하는 <경향잡지>의 전국적 보급을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경향잡지> 1949년 11월호 「사설」에서는 공산당원들은 “거짓말만 퍼뜨려 민심만 소란케하는 공산당의 기관지”를 “민중 속에 한장이라도 더 침투시키려 갖은 위험과 곤란을 무릅쓰고 분투노력하지 않는가?”라며 경각심을 촉구하면서 “만일 가톨릭운동의 하부기관은 아무 위험이나 난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고기관(주교회의)의 지령쯤이야 묵살하여 나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가톨릭운동’이란 말은 아예 입밖에 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라며 신자들이 <경향잡지>를 제대로 구독하지 않는 현상을 힐책했다. 이는 당시 가톨릭운동의 핵심은 바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48년 일본 도쿄로 맥아더 사령관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이러한 노력은 이승만 정권이 추진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중국 공산화에 따라서 북침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북한과 협상이나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통일하는 방법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통일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1946년 초부터 1950년 6월까지 기자회견과 대담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도높은 북진통일의사를 밝힌 바 있으며, 남한의 국방장관 신성모와 김석원 등 일부 장군들도 이승만 못지 않게 호전적인 북진 통일 발언을 하였다. 이들은, 남한은 북침준비가 다 되어 있으나 미국의 만류로 단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1950년 6월 17일에 이승만은 방한중인 미국무성 고문 덜레스와 가진 대담에서 “중국에서 공산당이 기반을 공고히 하는 기회를 갖기 전에 38선에서의 한국분단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실제로 38선에서의 빈번한 무력 충돌로 단순한 위협을 넘어서고 있었다.(박명림, 「한국전쟁의 구조」,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박현채 엮음, 소나무, 118-119쪽 참조)

이 당시 남한 천주교회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반공전선에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극동의 민주보루로서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지 이미 오래 전이다. 이렇게 우리는 벌써 다만 국민의 의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전우로서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비행기의 헌납운동에 더욱 힘쓰자... 물론 우리는 국민으로서 또는 직장의 일원으로 그외 또 여러부분으로 이 국민운동에 벌써 많은 부담이 있는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반공의 최후전사로 자인하는 가톨릭이다. 우리의 정신을 다시한번 표시하자.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누구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가톨릭시보> 1949년 11월 10일자 社告)

한편 일찌기 파리국제총회에 한국대표로 출석하여 단독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활약한 바 있으며, 이 당시 미국주재 한국대사로 임명되었던 장면(張勉)은 1949년 9월 12일 화성돈 기자구락부 오찬석상에서 “아시아를 위하여 고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연설을 통하여 남한정부는 공산세력을 방어하는 최전선에 있으므로 미국은 전폭적으로 남한정부에게 군사적인 무력원조에 힘써달라는 부탁하였다:

"이 석상에 모이신 여러분을 통하여 미국 국민에게 전세계 인류의 인격적 존엄과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같은 전우로서의 우의를 가지고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본세력이 우리 한국에서 구축되자 그 대신 새로운 전체주의적 공산세력이 우리 북한으로 침입해서 우리 민족은 더 큰 압박과 고통 속에서 파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공산세력을 방어하는 제일전선에 서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분투노력에 대해서는 미국으로서도 동감을 가지고 격려해 주는 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오늘에 있어 전세계를 휩쓰는 가장 위험한 침해세력에 대항해서 용감히 싸우고 있느니만큼 우리 공동목적을 위하여 고투하고 있는 우리에게 무기와 자료를 제공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충분한 방어목적을 달성하려면 아직도 더많은 각종 무기와 비행기와 선박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청년> 1949. 10)

▲ 노모와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 박사

애초부터 노기남 주교의 추천을 받아 미군정에서 주도하는 입법의원이 되어 정치무대로 등장한 장면은 가톨릭교회 정치세력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온 그의 정치적 명망성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장면이 주미대사로서 호주, 필리핀 등지를 방문하고 1950년 잠시 한국에 귀국하였을 때, 당일 김포비행장에는 교황사절 방주교, 노주교, 시내 각 가톨릭운동단체의 대표들과 국무총리 서리, 정부 각부처의 장관과 처장, 서울시장, 국회부의장 등 백여 명의 직접 나와서 환영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정치적 위치와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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