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겪은 북한교회의 분열과 아픔 (3)

민족사 안에서 흔적을 남긴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측면을 오는 8.15일 광복절을 즈음하여 다루려 한다. 우리 역사와 백성들 안에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어떠하실 지 가늠해 보고 지금 여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행해야 할 회개와 쇄신의 방향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이번에는 해방 공간에서 북한교회의 모습을 3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해방공간의 겪은 북한교회의 분열과 아픔

1. 해방공간에 대한 북한교회의 다양한 대처방식
2. 민주개혁과 북한 교회의 좌우 분열
3. 북조선기독교도연맹과 북한교회의 수난

북한교회 좌익세력의 결집 : 북조선기독교도연맹

해방공간에서 개신교 세력은 단순히 반공적 정치세력으로 일원화 시킬 수 없었으며, 진보와 보수 양진영으로 갈라지는 것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복음적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북한사회가 민주개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1946년 11월 각급 인민위원회 건설을 통해 인민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남아있었던 기독교 신자대중을 인민민주주의혁명의 통일전선 안으로 묶어내기 위하여 개신교 진영의 좌익 분파는 조직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북한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요청되는 조직화된 개신교 좌파진영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이 종교적 정치집단이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이바지하는 종교조직으로 만들어지려면, 우선 한국교회 안에 완강하게 깃들어 있는 제국주의적 요소를 완전히 청산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이식된 종교로서 특히 개신교는 미국 - 혹은 미국선교사 - 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요소였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전세계적 냉전의 첨예한 대립지점 중 하나가 되었고, 남한교회가 직접, 간접으로 미국의 강력한 영향권 안에 놓여온 까닭에 “탈제국주의적인 신앙과 교회의 건설”은 북한교회가 생존하기 위한 일차적 조건이기도 했다.

아울러 개신교 세력이 반제반봉건 과제의 해결을 위한 통일전선에 참여할 것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종교활동은 혁명과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종교활동을 수행하도록 요구되었다.(강인철,「월남 개신교, 천주교인의 뿌리」,<역사비평> 1992. 여름호 114-115쪽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교회 안의 진보적 분파는 인민위원회 선거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1946년 선거가 끝나자 그해 11월 28일에 “기독교의 박애적 원칙에 기초하여 인민의 애국열을 환기하며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건국사업에 일치협력할 것”을 목적으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을 건설하게 된다.

기독교도연맹은 1947년 여름까지 북한 개신교 신자의 1/3정도가 가입하였으며, 1948년 9월 1일 현재 맹원수는 8만 5천명이었다. 또 지역적으로는 함경도와 황해도 지역이 주축을 이루고, 과거부터 보수성향이 더욱 강하고 조선민주당이 득세하던 평안도 지역에는 기반을 가질 수 없었다.(이 연맹은 1946년 초에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북조선기독교연맹’을 건설하였다가 11월에 일반 신자층에게도 확대하여 ‘북조선기독교도연맹’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맹이 조직되면서, 북한 개신교회는 친사회주의적 교회와 이에 비협조적인 교회로 양분되어 갔다. 기독교도 연맹에 거부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주로 평안도 재건파 교역자들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김흥수, 「해방직후 북한교회의 실상」, 64-65쪽 참조)

한편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위원장이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이었던 강양욱 목사는, 수차에 걸쳐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를 방문하여 천주교회도 연맹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홍주교는 그 까닭을 “일시적, 또는 외면적으로라도 무신론자들에게 협력하는 것은 가톨릭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요,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으며, 신자들이 절대로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천주교평양교구사> 194쪽 참조) 이는 1949년 7월 비오 11세 교황치하에서, 바티칸 교리성이 교령을 발표하여 가톨릭신자들은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것을 격려하는 것을 금지시켰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 교령에서는 신자들이 공산주의 사상이 담겨진 서적이나 신문을 출판하고 배포하거나 심지어 읽는 것까지 금지하였던 것이다.(맥거번, <마르크시즘과 기독교>, 한울, 1988, 158쪽 참조)

따라서 천주교 성직자나 신자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개신교가 개별교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사나 신자 개인의 소신에 따라서 연맹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지만, 천주교회의 경우에는 미소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점령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교회구조 속에 편입되어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한 교회가 공통된 견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공통된 견해란 천주교회에 우호적인 미군정에 협조적이며 반공주의적 태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평양교구는 미국계 메리놀선교사들의 감독하에 성장해 왔던 교회였기 때문에 소련점령하에서도 교회 지도자들은 친미적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함흥교구 역시 독일계 베네딕트회 선교관할이었으므로 나치즘의 반공정책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황해도의 김철규 신부의 경우에는, 1945년 9월경 황해도 해주시 소련군환영대회에서 종교계 대표로 초청되어 연설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김두봉 등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교섭을 받은 바 있는 김신부는 기독교도 연맹 결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회유대상이 되었다. 김신부는 결국 1946년 10월 기독교도연맹 결성과 관련하여 평양으로 오라는 초청장을 받고는 이내 월남해 버리고 만다.

한편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47년 2월 성립된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연맹의 지도적 인사들이 대거 발탁되면서 보수적 기독교 진영에 비하여 더 큰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도 국가권력은 대부분 친일파 지주적 성격을 갖는 보수적 종교집단들에 대한 직접적인 응징을 하기보다 단지 외적으로 드러나는 위법사실에서만 처벌하고, 부정적 요소는 종교 내부의 노력으로 청산되도록 진보적 종교세력을 후원하는 정도에 그쳤다.

▲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구성된 1947년께 만들어진 대형 유인물. 김일성 당시 북조선인민위원장 사진 양쪽에 태극기가 배치된 게 눈에 띈다.(사진출처-한겨레)

보수적 종교진영에 대한 타격 : 미신타파운동

1947년 전후로 북한정권은 진보적 종교진영에 대한 후원과 보수적 종교세력에 대한 타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중앙연감>(1950년판)에 의하면 “공화국 북반부에서는 완전히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다. 1946년 3월 23일에 발표된 20개 정강에는 ‘전체 인민에게 언론 출판 집회 및 신앙의 자유를 보장시킬 것’이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 지적되어 있다. 공화국 헌법에는 제 14조에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조선 공민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종교의 자유는 실상 민주개혁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협조하는 종교진영에 대한 합법적인 보호이며, 종교세력 일반에 대한 자유를 공적으로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 불교에서는 북조선불교총무원, 천도교는 1946년 2월 1일 천도교북조선 종무원이 창설되어 있으며, 자기들의 정당인 ‘청우당’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단체들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1947)’ 산하에 결속되었다. 나머지 종교적 보수진영은 북한정권의 반종교 선전과 고립정책에 의해 상당한 혼란에 빠지고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상황을 <천주교평양교구사>는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유물사관에 입각한 정치노선에 상반된 유신론 배제에 급급하여 종교를 아편이라 불렀고, 학교 교육내용을 철저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마구 흔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진화론을 앞세운 묵은 과학이론으로 학생들 사고에 혼돈을 초래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소년단, 민청 따위의 무서운 세포조직을 통하여 학우들의 반동여부 신자학생들의 교회활동을 탐지 보고토록 하며, 일요일은 영화감상회, 야영대회, 운동회 등을 구실로 주일미사 참여를 방해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활동을 감시, 방해하는 것도 시원치 않았던 그들은 교회학교를 몰수 또는 폐쇄하기 시작하였다.(<천주교평양교구사> 195쪽)

실제로 북한정권은 민주개혁을 위한 제반조치와 함께 1946년 12월 6일부터 “건국사상 총동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앞서 1946년 11월 13일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에서는 “미신타파돌격기간”을 설정하고 이를 대중운동의 형식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토지개혁 중 제반 민주개혁 조치들과 비숫한 차원의 대중운동으로 추진된 “미산타파돌격”사업은 분명히 반종교적 성격을 띤 정책적 조치였으며, 기간 설정 직전의 <11‧3일요선거>참여거부에 타격을 입은 보복적 성격을 담고 있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 11월 28일 결성된 것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때, 북한정권의 종교정책을 확연하게 볼 수 있는 실례이다. 즉, 인민정권 수립 이전까지는 가능한 광범위한 수준에서 통일전선 안에 많은 신자대중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인민정권이 수립된 이후, 종교세력을 크게 둘로 나누어 견인하여야 할 세력과 타격해야 할 세력에게 서로 다른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교육국에서는 각 정당, 사회단체, 교육부 책임자 좌담회를 열고 미신타파를 위한 대책으로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미신타파돌격기간으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우리 인민들은 해방전의 무지와 몽매에서 벗어나 정치, 사상적으로 더욱 각성되었으며 새조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전사> 제24권 1981, 502쪽 참조)

이러한 미신타파운동은 민주개혁으로 경제적 토대를 현저하게 상실하고, 월남해버린 종교지도자들로 인하여 약화된 보수적 종교진영에게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말았다. 사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마지못해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는 목사, 신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북한 천주교회는 더욱 난감한 처지에 몰리게 된다. 해방을 맞이할 당시 북한 천주교회는 혁명을 지지하고 이에 동참하는 진보적 분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일제하부터 교회 지도층이 정교분리라는 껍질 속에서 총체적으로 친일화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제도교회내에서는 민족주의적 분파가 완전히 숙청되었고, 제도교회 안에 남아있던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권위 아래서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개인주의적 관념론적 신앙 형태에 완전히 잠겨있었던 까닭이다.

이같은 사실들로 인해 북한 천주교회는 “내부로부터 진보적인 분파가 중심을 세우고 교회 안의 제국주의적, 봉건적 요소를 청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교회전체가 완전히 혁명의 대상으로 타도될 위험성이 높았다. 연길, 함흥교구와 덕원면속구의 경우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 바, 독일 출신이란 이유로 일제 말엽까지 유일하게 자유롭게 활동했던 독일인 사제와 수도자들은 이제 똑같은 이유로 가장 먼저 세찬 탄압을 받게 된다. 이미 1945년 9월 2일 연길교구의 첼러 수사가 소련군에 의해 총살당했고, 1946년 5월에는 브레헤르 백주교를 비롯한 독일인 신부 19명, 수사17명, 수녀2명, 이탈리아인 수녀 1명이 체포되어 연길, 삼도구, 무산 세 곳에 갇히는 일이 일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연기되어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의 전망이 극히 불투명해지면서 북한 정치지도자들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적대적인 것으로 바뀌어 갔으며, 민주개혁을 반대하는 투쟁에 일부 종교인들이 가담했던 점 때문에 북한정권과 교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나아가 남한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미군정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반공적 친이승만적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단독정부 수립노선을 지지한 사실과, 1947년 2월 추방되었던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대거 재입국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미군정과 남한교회를 밀착시켜왔던 까닭에 북한 천주교회와 북한 인민정권 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갔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동안, 천주교회는 평양에 주재하고 있던 미군 연락장교와 친교를 맺고 이들을 통해 남한교회 및 서울의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했던 점 역시 북한당국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북한당국과 소련군 사령부는 천주교회가 “남한과의 비밀연락의 근거지”라는 의심을 품고 1947년 6월경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한편 서울교구의 직접적인 통제아래 있던 황해도지역과 춘천교구 통제하의 강원도 일부 지역의 천주교신자들은 보다 강경한 반공, 반혁명적 태도를 취했다.

이를테면, 1948년에 남한의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과 제휴하여 무기를 입수한 ‘통일단’은 가톨릭신자가 중심이 된 비밀지하조직으로서, 황해도 장련에서 공산당 공공건물을 공격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949년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북조선의 가을'이란 사진첩 맨 첫장에 실린 김일성의 모습(왼쪽). 1946년 무렵의 김일성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의 모습(오른쪽). 그때 김일성의 나이가 34살 이었다.(사진출처-한겨레)

북한 친미반공교회의 수난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 인민정권이 수립되면서 종교세력에 대한 북한당국의 입장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남한교회가 취한 태도는 북한정권이 천주교회를 반동적 집단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47년 7월 16일 서울 교구장 노기남주교는 각 교회에 “수난받고 있는 연길, 덕원교구를 위해 기구할 것을 ”권고하는 공문을 발송하여 북한정권의 종교정책을 비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교황청에서 1947년 10월 9일에 평양교구장이었던 방(方)신부를 주한 초대교황사절로 보내어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승인하려는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1948년에는 “남조선 모든 감목의 연합교서”발표하여 나라의 독립과 사상의 안정과 종교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권장하고, 그해 6월 20일에 서울교구는 독립촉구를 기원하는 대례미사 거행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남한교회의 친미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제헌의회 선거기간 동안 가톨릭적 면모를 가진 사람들을 대거 입후보시킴으로서 현상화되었다. 한편 북한교회 역시 남한교회와 연계하여 북한정권의 제반정책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으며, 소위 ‘반공삐라’ 사건 등 반공운동에 가담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특히 종교적 통일전선체인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대한 천주교회의 배타성은 향후 북한 사회주의정권과 천주교회의 피할 수 없는 대립을 자초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공적으로 선포되면서 종교관계 정국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정권 수립 이후로는 통일전선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 즉 이른바 ‘반항하는 청산계급분자’와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반혁명세력(남한과 미국을 지칭)과 연계된 집단’에 대해선 엄격한 독재가 적용되었다. 이러한 반혁명세력에 대한 투쟁은 국가권력을 전면적으로 동원하여 수행되었다.

개신교의 경우에도 기독교자유당사건(1947.11), 한독당사건(1948), 신한청년단사건(1949년 여름) 등으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조선민주당은 1949년 말경에는 당세가 약 1/5정도로 위축되었다. 또 1950년 현재 개신교 신자수는 약 12만 명, 교회수는 약 1,400개소라고 하는데, 이는 해방 후부터 약 4년 동안 교세의 40% 가량이 감소했음을 뜻한다.

한편 개신교회의 진보적 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48년부터 도, 군, 면의 연맹지부가 결성되어, 1949년에 기독교도연맹 총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그동안 북한정권에 대한 비난을 줄곧 퍼부어 왔던 이북 5도연합노회를 대신하여 기독교도연맹 총회가 노회와 지교회를 직접 주관하는 한편,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통합하여 ‘기독교신학교’를 세우고 이를 연맹이 직접 주관하였다.

그리고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제3차 총회에서는 강령을 새로 채택하여, 강령 전문에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며, 인민공화국 헌법과 정부 정강을 실천한다”는 표현을 삽입하였다. 이와 아울러 정부당국은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모든 성직자들을 파면시켜버렸다.

▲ 덕원수도원

그러나 종교집단에 대한 탄압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바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할수 있다. 북한정권은 1948년 9월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 소련군이 12월에 철수하기 시작하자 북한 전지역에 걸쳐 천주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과 타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시작은 평양시 인민위원회가 평양교구에서 가장 크게 신축한 관후리 성당을 시에서 양도받으려던 사건이다. 당시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한면수가 평양교구장 앞으로 보낸 통고문에 의하면 위원회에서는 “도시미화상 필요한것이니 그 건물 대신으로 귀 교구에서 선정한 시내 다른 건물을 제공하기로 결정”(12월 28일자)하였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홍주교의 강력한 반발로 일단 유보되었다.

그러나 1949년 5월 덕원수도원 몰수와 성직자 체포사건을 항의하러 가던 차에 홍주교가 납치되어 죽자, 평양교구내 성직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그 중에 더러는 죽음을 당하였으며 관후리성당을 비롯해 성당 및 교회재산이 모두 몰수되어 공연장, 오락장, 도서관 등 공공집회장으로 사용되었다.(<천주교평양교구사> 201-203쪽 참조)

1949년 5월부터 전쟁 직전에 이르기까지 주교가 된 지학순, 김남수, 그리고 김철규 신부 등 몇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체포당했다. 함흥, 덕원교구의 경우에는 밀주제조 및 탈세사건으로 성직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덕원수도원에서는 폭약과 무기, 반공전단이 발견되어 ‘반국가음모사건’으로 수도자들이 체포되었다. 결국 1949년 5월 7일 덕원교구 교구장이면서 수도원의 원장인 신(辛)보니파시오 주교를 비롯한 모든 수도성직자가 체포되고 교회재산도 전부 몰수되었다.

이러한 성직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은 그들이 반정부적 반공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가담했는지 전모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덕원수도원에서 반공전단과 반공자명단을 인쇄한 적이 있다는 점, 검거가 이루어지던 당일 문서를 미리 정리해두었다가 이 중 일부를 불태우거나 땅에 묻도록 지시하고 있는 점들이 혐의 사실로 나타난다. 이 사건 직후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가 발표한 항의성명에서 “교회와 개인은 공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인데 한 개인의 범죄로 교회를 폐쇄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천주교평양교구사󰡕 210쪽)”고 하면서 범죄사실을 일부 인정하는 점 등으로 보아 북한정권의 탄압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 6ㆍ25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수용소에 억류됐다가 풀려나 독일에 돌아온 성 베네딕도회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실제로 덕원수도원은 1946년의 토지개혁과 1947년 12월의 화폐개혁 및 1948년 2월의 예금몰수조치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 역시 당시에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던 수도원 측에서 북한정권에 불만을 갖고 반공사건에 연루되었던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개시되는 시점이 한국주교단의 반공적 교서가 주교단기관지인 <경향잡지>를 통해 발표된 시점(1949년 5월, 1950년 4월), 그리고 함흥, 덕원교구장 신주교가 공산주의적 여성정책을 비판하는 논문을 <가톨릭 청년>에 게재한 시점(1949년 4월)과 일치하고 있는 점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이는 남한교회의 북한정권에 대한 태도가 곧 북한교회에 대한 북한정권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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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편집국장 200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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