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씨알의 소리> 297호(2025년 9-10월)에 실린 글입니다.
두 번이나 잠 못 들게 했던 그것
1992년 초 보통 영장으로 불렀던 ‘입영 통지서’를 받고 그날 잠을 못 잤다. 첫 영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연기했고, 1994년 4월 휴학 중에 다시 영장이 날아왔다. 그날 역시 잠을 못 잤다. 이 땅의 수많은 청년이 이 종이쪽지 한 장을 받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하얗게 밤을 지새웠을까 싶다. 두 번째 영장을 받았을 때는 연기할 방법도 이유도 없었다. 첫 영장을 받았을 때 군 복무 기간은 30개월이었는데, 두 번째 영장을 받았을 때는 26개월로 줄었다. 차라리 더 미루지 않고 빨리 날아와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3주 뒤에 입대해야 했다.
정말 바빠졌다. 휴학하고 그냥 놀고만 있을 수 없다고 풍물도 배우고 청년성서모임에도 나갔는데, 일단 그것부터 정리해야 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짐도 정리하고 이것저것 마무리하고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하루하루가 그토록 소중했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그렇게 귀한 시간을 보내다가 1994년 5월 3일 의정부 306 보충대에 들어갔다. 그날 비가 왔다.
26개월 동안 온갖 일이 많았는데, 다행히 크게 다친 곳 없이 드디어 1996년 7월 4일 전역했다. 근무한 부대의 사단본부가 화전동에 있어 전역할 때는 수색역까지 전역병을 태워다 주었다. 전역증을 나누어 주며 “너희들은 전역이다, 알아서들 집에 가라. 단 오늘까지는 군인이니까 사고 치면 군법이 적용되니 조신하게 보내라”는 내용을 전해 준다. 가장 혈기왕성했던 26개월 얼룩무늬 청춘이 그렇게 허무하게 혹은 쿨하게 마무리되었다. 훈련소 동기들과 대낮에 신촌에서 일잔하고 헤어졌다. 입대했던 그날처럼 내리던 비를 흠뻑 맞으며 ‘이젠 자유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자마자 어머니에게 전역 신고를 했다. 막내아들이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모습을 본 그토록 환한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물론 아버지도 무척 기뻐하셨다.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셨던 아름다운 전승탑, 팔을 벌리며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들을 군대에 보낸 모든 어머니가 다 기쁘게 아들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군대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채 해병을 비롯해 군대에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전우도 있다.
미처 버리지 못하고 남은 것들
어디서는 ‘수양록’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부대는 명상록이라고 해서 이렇게 일기를 썼다. 그날 있었던 일을 정말 간단하게 적었는데, 이등병 때 잠깐 썼던 것 같다. 아주 형식적으로 대충 썼지만,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얼추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등병 시절을 보내던 1994년 여름은 정말 끔찍하게 더웠다. 덕분에 낮 시간 작업은 많이 하지 않고, 점심 먹고 두세 시간씩 오침을 할 때가 많았다.
요즘 국방 관련 뉴스에서 K-9 자주포가 종종 거론된다. 내가 있던 부대(포대)는 K-55 자주포를 타고 다녔다. 처음 볼 때는 마치 탱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인 포는 차에 끌고 다니다가 후다닥 내려 포 자리를 잡고 사격을 하는데, 자주포는 이른바 ‘방열’을 할 때 그 속도가 다르고, 견인포처럼 삽질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지금 같으면 가혹 행위가 거의 근절되어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이런저런 연습용으로 쓰는 40킬로그램짜리 모의 포탄은 아주 효과적인 ‘얼차려’ 도구였다. 그것을 어깨에 매고 선착순을 시킨다거나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면 무릎이 주저앉는 것 같다. 게다가 이등병 시절엔 북에서 ‘서울 불바다’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다. 명상록에는 그처럼 한창 힘들게 적응해 가던 이등병 시절, 이런저런 내용이 남아 있다. 물론 ‘얼차려’ 같은 것은 적지 않지만, 주특기 교육이라고 적으면 대체로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군 생활 내내 목에 걸고 있거나 적어도 호주머니엔 넣고 다녔던 게 있다. 원래 이름은 ‘인식표’이고, ‘군번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얼마나 군 생활이 고되었으면 많은 사람이 이것을 ‘개 목걸이’이라고 불렀을까? 여기엔 이름, 군번, 혈액형이 적혀 있다.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출혈이 심하다면, 군의관이나 위생병은 이 인식표를 보고 수혈을 해줄 것이다. 또 전투 중 사망한 병사의 신원을 확인해 줄 것이다. 줄이 오래되어 끊어졌다.
군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뭐니뭐니해도 휴가일 것이다. 그때 발급되는 휴가증은 정말 소중한 문서이지만, 휴가 중에 크게 썼던 것 같지는 않다. 같이 휴가 나온 전우들과 문산 럭키 다방에 들러 커피 한잔하고, 기쁜 마음으로 문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촌역까지 간다. 신촌역 앞 고만고만한 빌딩과 복잡한 거리를 보자 고향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대한 감각이 실제로는 제각각일 수 있었다는 경험이 문화 충격이었다. 아무리 병장 휴가라도 다시 부대 들어가려니 심란하기만 했다. 문산에서 저녁을 먹고 부대에 복귀하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우리에게 군대란 무엇인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잠시 웃음이 나왔던 장면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어제 새벽 2시에 사망했습니다.” [금명] “파혼하던 날 나는 간첩처럼 울었다.” 드라마 속 금명이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파혼을 하는데, 원래 그날이 내 첫 외박일이었다. 원래 1994년 7월 25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 주석의 죽음으로 남북 정상의 만남은 8년 뒤로 미뤄진다. 보통 김일성 사망 뉴스는 가짜 뉴스였던 적이 많았는데, 그때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날 잠깐 면회만 있었고, 모든 외박이 취소되고 비상 상태로 들어갔다. 다음 외박 때는 위수 지역이 문산이었는데, 그냥 점프(위수 지역 이탈)를 해 집으로 왔다. 나중에 이 위수 지역이 군부대 근처 상권의 문제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가 치밀었다.
'폭싹 속았수다'에는 내 군 생활과 관련해 좀 친근한 장면이 하나 더 나온다. 금명이의 남편이 되는 박충섭이 제대했을 때 사단 마크가 우리 부대 마크였다. 실제로는 제대할 때 전투복에 붙은 마크를 떼야 한다. 계급장도 마크도 떼고, 이제 현역 전투복은 예비군복으로 용도가 바뀌어야 한다. 예비군 훈련 때 군복을 입으면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고 하지만, 남 욕할 일도 아닌 것이 나 또한 꽤 건들건들거렸다. 심각한 일탈까지는 아니고 장난기가 많이 묻어 있기도 한데, 군복이 주는 묘한 해방감이 있는 것 같다.
함께 고생한 전우들과 이별할 시간이 찾아왔다. 전역하는 선배를 환송하기 위해 양열로 쭉 서 있는 걸 ‘도열’이라고 한다. 동기와 나 둘이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후배들이 한 번 헹가래를 해 주고, "형 어디 가요" 하는데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주에 다시 가야 했다. 후배들이 준비해 준 이른바 ‘방패’를 찾기 위해서다. 아마 이토록 촌스러운 기념패를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받았던 것 같다. 어디에 걸어 두는 것도 아니고 크기가 커 보관하기도 불편하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잘 두면 언젠가는 생활풍속사를 보여 주는 역사 유물은 될 수 있겠다. 게다가 적어도 전역할 무렵 같이 군 생활했던 전우들의 이름을 다시 돌아볼 수도 있다.
내년이면 전역한 지 딱 30년이 된다. 이제는 군에 들어가는 꿈을 꾸지 않지만, 전역 후 10여 년간 군에 다시 들어가는 꿈을 참 자주 꾸었다. 이쯤 되면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군대 생활은 분명 혐오스러운 구석이 많았지만, 굳이 군 생활이 그렇게 억울하다거나 헛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힘겨운 삶의 한 국면이었으나, 20대 한창 좋은 나이 아니던가. 하여 약간의 과정을 더해 군대와 관련된 온갖 무용담이 펼쳐진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정말 싫어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이왕 했던 군 생활을 미화하고픈 일종 방어적 기제가 작동한 면도 있겠고, 파릇파릇했던 시절이라 그립기도 할 것이다.
군대에서 철든다는 말도 믿지 않지만, 군대에서 꼭 못된 것만 배워 오는 것도 아니다. 군대를 한국 사회가 군대화된다기보다 발전 도상기 한국 사회 자체가 군대처럼 돌아갔던 것이 먼저였던 것 같다. 한번은 뭔 일이 있어 여럿이 인사계(요즘 행정보급관)에 불려 갔다. 그때 인사계가 무엇을 위해 군 생활을 하냐고 물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나와 가족을 위해서라고. 굳이 나라까지 들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 나라의 군대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군 생활을 하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물건처럼 취급하지 말고, 있는 동안 잘 대우해 주고 몸 성히 집으로 보내 주어야 한다. 사실 그것이 첫 번째 임무가 되어야 한다.
김지환
<가톨릭평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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