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겪은 북한교회의 분열과 아픔 (2)

민족사 안에서 흔적을 남긴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측면을 오는 8.15일 광복절을 즈음하여 다루려 한다. 우리 역사와 백성들 안에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어떠하실 지 가늠해 보고 지금 여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행해야 할 회개와 쇄신의 방향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이번에는 해방 공간에서 북한교회의 모습을 3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해방공간의 겪은 북한교회의 분열과 아픔

1. 해방공간에 대한 북한교회의 다양한 대처방식
2. 민주개혁과 북한 교회의 좌우 분열
3. 북조선기독교도연맹과 북한교회의 수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성과 민주개혁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 각정당, 사회단체, 각 행정국 및 각 도, 시, 군인민위원회대표 확대협의회’라는 통일전선체를 통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조직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서기장에 강양욱(목사, 민주당), 위원에 홍기황(기독교인), 홍기주(장로), 방우용(천도교인 ?) 등 종교인들을 포함시킴으로써 통일전선을 보다 극대화시켰다.

요컨대 김일성은 해방 직후의 혼란한 정치상황을 그의 항일무장투쟁의 성과와 군중노선, 통일전선, 현지지도 등을 통하여 정면돌파하고 모든 정파를 하나의 통일전선체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있어서 중앙정권기관으로서 북조선 인민사회단체, 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법령을 제정할 권한”(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에 관한 규정 제3조, 제7조)을 가진 인민정권으로서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물질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민주개혁을 수행하게 된다.(이 과정에 소련군정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둔다)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법령’과 ‘토지개혁실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고 즉시 토지개혁에 착수하였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몰수”, “1농가 5정보 이상 토지몰수”, “몰수된 토지의 무상분배”, “분배된 토지의 매매, 소작, 저당 금지” 등의 원칙 위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은 광범한 대중을 동원하여 불과 20여일만에 끝마쳤다.

가난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국에 1만 2천개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고 통일전선의 이름아래 약 300여만명의 조직된 대중을 동원하여 실시한 토지개혁은 한마디로 북한 농촌의 계급구조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대사변이었다. 총경지 면적 198만 정보 가운데 100만 정보가 몰수되어 무상분배되었다. 이로써 농촌에서는 봉건적인 지주소작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토지개혁 과정에서 농민가운데 뛰어난 사람들을 공산당에 흡수하여 대중적 토대를 다져나갔다.

이어서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6월 24일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을 공포하여 “1일 8시간 노동제의 확립”과 “남녀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사회보장제” 등을 규정하였다. 또한 8월 10일에는 ‘산업,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을 발표하여 민족자본을 제외한 90%의 산업시설을 국유화하였다. 1946년 2월에 시작하여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성될 때가지 계속된 민주개혁은 북한사회를 바닥으로부터 변화시킨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자본가나 지주계급에 의존하여 활동해온 우파세력을 일거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며, 공산당의 계급적 기반을 확보하고, 좌파계열 내에서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력이 확고부동한 자리에 놓여졌다. 김일성은 토지개혁이 실시된 지 불과 35일만인 4월 10일, 토지개혁의 결과를 마무리 짓는 연설을 통해 민주개혁이 반동적 사회세력의 정치, 경제적 토대를 박탈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당은 토지개혁의 중대한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에 망라된 각 당, 각파, 각계각층과 통일전선을 강화하여 그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였다... 토지개혁은 조선농촌의 발전을 저해하고 조선농민들을 빈궁과 기아에 몰아넣은 토지에 대한 봉건적 소유제도만 청산한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반동분자들의 활동의 정치, 경제적 근거지들을 영원히 매장하였다.

종교집단의 경제적 사회적 타격

사실 북한지역의 기독교 정치세력과 종교집단은 민주개혁으로 인하여 그 경제적, 사회적 토대에 극심한 타격을 입고 월남하거나 다른 활로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은 전문 17개조로 되어 있고 그 중 제3조에 토지의 몰수대상이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 지적된 몰수범위 제4항에 “5정보 이상으로 소유한 성당, 승원, 기타 종교단체의 소유지”가 명시되어 있으며, 몰수토지 총 1,000,325 정보 가운데 14,401 정보가 그에 해당된다. 수치상으로는 종교단체 소유지는 전체 몰수토지의 1%에 지나지 않지만 목사 개인, 혹은 유력한 신자들에게 몰수한 토지를 포함한다면 종교집단이 입은 재산상의 피해는 더욱 클 것이다. 김일성이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고, 놀고 먹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들은 우리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바와 같이 지주층의 호응을 받고 성장한 천주교 등 기독교 세력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당시에 인민정권과 정치적 경쟁상태에 있던 개신교 정치세력의 경제적 토대는 신자 개인들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와 재산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재화의 몰수는 곧 개신교 정치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 덕원신학교

천주교회의 경우에, 연길, 함흥, 덕원 교구는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독일계 선교사들이 사목활동을 하였던 관계로 일제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한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높은 언덕에 성당과 사범학교, 승공학교와 농장과 기타 목공소가 우뚝 솟아 있으며, 4만평이나 되는 대지를 소유하였던 지주적 성격을 지녔다.(<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3> 296쪽 참조) 따라서 민주개혁 당시에 그 농장과 토지를 몰수 당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당시 민주개혁의 결과로 북한교회, 특히 덕원과 연길교구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남한교회는 이들을 원조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가톨릭과 악마의 전쟁은 벌어졌다.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한 집안이오 한 나라이다. 남조선 가톨릭도 곤란치 않은 바는 아니오, 이어서 더 발전함도 좋기는 하지만, 함경도 가톨릭의 총본영이, 북간도 가톨릭의 총사령부가 전멸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안전한 연락의 길은 이미 마련되어 있고, 이제부터 들어오는 구제금은 덕원과 연길에 적정히 분배될 것이니, 교형자매들이시여! 남의 일로 알지 말고 총궐기하시라.(경향잡지, 제 41권 제 987호, 1947.6.1 )

또한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25일 ‘학교교육 개선책에 관한 결정’에 따라 5년제 의무교육제를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교회가 운영하는 초등교육기관들이 모두 국유화 되었다.(임건묵, 「해방직후 북한기독교와 공산세력의 관계 연구」, 감신대 석사학위논문, 1987, 37쪽 참조) 따라서 교회는 교회재산으로서의 학교건물과 자신의 종교적 이데올로기 만들고 전파하는 수단으로서의 학교를 모두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우익 개신교 세력의 정치적 반공운동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민주개혁을 실행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세력은 사회, 경제적 토대를 현저하게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개신교가 해방 초기부터 기독교 정당을 건설하여 건국이념으로서 기독교사상을 채택하기 위한 노력을 한 까닭은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때, 해방된 조국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명목아래 무신론에 기초한 반종교세력인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반공투쟁의 한 방법으로서 정치세력화를 감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교회는 임시인민위원회가 단행한 민주개혁을 봉건적 요소를 철폐하고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하려는 정책이라기 보다 종교를 말살하려는 악마적 책동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1946년 9월 5일 임시인민위원회에서 ‘도, 시, 군 단위 임시인민위원 선거’를 위한 법령을 공포하자 교회측은 극심한 반발을 보였다. 이제 악마적 존재인 인민위원회가 군 단위까지 확대되리라는 위기의식에 봉착한 것이다. 1946년 11월 3일 실시하기로 예정된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하여, 교회측은 비록 선거일을 주일날로 택하여 예배를 방해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지만, 인민위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북한정권에 도전하는 반동적인 책동으로 보여졌다. 이 당시 교회 안팎에서는 “선거실시는 시기상조이며 자유경쟁이라야 정말 민주주의적 선거가 된다. 승려와 목사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종교에 반대된다”는 말이 유포되었던 것이다.

특히 장로교의 5도 연합노회는 10월 20일 회합을 갖고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북한당국에 전달하였다. 또한 결의문에서는 “미주로부터 돌아온 이승만 박사와 중경으로부터 광복의 기쁨을 가지고 환도한 임정요인을 예방하고 치사드리는일”을 목적으로 북한 교회를 대표하는 사절단을 남한에 파견하여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였다.

이 사절단의 한 사람이었던 김양선 목사는 이것은 명분일 뿐이고, 실은 남한교회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설하고 있다.(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 10년사>, 예장총회교육부, 1956, 49쪽 참조) 어쨌든 연합노회는 처음부터 남한교회의 친미반공교회적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에 따라서 김일성은 11월 1일 평양시 민주선거 경축대회에서 “역사적인 민주선거를 앞두고”라는 연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어떤 사람은 승려와 목사는 인민위원으로 선거되어서는 안되며 선거에 참가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에 위배되는 행동이 된다고 한다...인민위원에 당선되었다는 것은 인민의 신임을 받고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교인과 목사, 승려들이 자기의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따위의 종교는 있을 수 없다...그런고로 선량하고 애국적인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민위원에 당선될 수 있으며 인민위원회의 일에 열성적으로 참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않으면 안된다.

북조선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어떤 종교이든 간에 탄압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북조선에 있는 모든 종교인은 공민으로서 완전한 권리와 자유를 향유하고 있고, 이 인민위원 선거에도 동등한 권리를 갖고 참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목사, 승려들이 인민위원회 위원후보에 추천되고, 대부분의 신도는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가하고 있다. 만약 종교활동가 중 어떤 사람이 종교의 전통과 교리를 이유로 이 선거에 신도, 승려, 목사들의 참가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외국에 매수당한 스파이로서 종교를 체제파괴 활동에 이용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인민위원회 선거를 계기로 종교인들은 확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서로 갈라서게 된다. 김일성은 비록 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사회주의적 새 조국건설을 위하여 복무하지 않는 자는 엄격하게 통제할 것을 천명하였으며, 혁명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가진 종교인들은 누구나 영향력있는 정치적 지위에 올라 인민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더이상 특권적 존재로 대우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해 11월 3일에 개최된 도, 시, 군 인민위원 선거에서는 당선자 3,456명 가운데 2,7%에 해당하는 94명의 종교인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인민위원으로 당선된 종교인들 가운데 천주교 신부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은 물론 없다.

사회주의적 기독교운동 : 김창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서 전개된 그리스도교 운동은 대부분 우익 반공주의 노선을 띤 것이었다. 해방 직후 신의주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한 한경직 목사가 “독립은 하되 기독교 이상에 의하여 건국케할 의무가 있다. 건국하되 유물론적 독재국이 되면 어찌하랴”(한경직,󰡔건국과 기독교󰡕 서울 보린원, 1949,148쪽)고 말한 데서 보수적인 기독교 세력의 정치적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건국 이후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정치적 입장표명이 없었던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 하에서 활동하던 김창준은, 한경직과는 달리 해방후 통일된 조국건설운동에 깊이 참여하면서 좌익의 입장에 서서 미군정과 단정을 반대하며 통일된 민주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제도교회의 반역자가 되었다. 1947년 2월 24일 김창준은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는데, 당시 󰡔조선연감󰡕은 그 동맹이 “그리스도와 그리그도교의 사명인 진정한 인류의해방”을 목표로 하고 , “민주건국에 몸을 던지는 기독교의 토대가 되려고 반그리스도적 반민주적인 것에 대한 과감한 투쟁을 개시할 것을 선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조선연감> 1948년판, 조선통신사, 312쪽 참조)

그래서 기독교민주동맹 결성식에서 발표된 선언문에는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은 일부 특권계급의 이익을 두둔하거나 전제와 압박에 추종하는 것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인민적이요 평화적이요 정의감이 굿센 곳에 있다”면서 “성스러운 8, 15 해방을 당하여도 그들 일부 지도층은 과거를 회개, 근심함이 없이 자신이 의연히 반인민적 노선을 걸을 뿐 아니라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신자를 오도하고 있음은 통탄할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친일, 반민족 교회지도자를 규탄하였다. 또한 그는 신탁통치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고 “인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밝혔다.(이덕주 ,「사회변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기독교사상> 1990년 7월호, 166-168참조)

그 후 김창준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여하여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창준은 남한 교회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지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의 초대 서기장이 되어 북한에서 활동하였다.(김흥수, 「김창준의 생애와 신학」, <기독교사상> 1991, 봄 198-19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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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편집국장 200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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