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3년간 남한 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4)

 민족사 안에서 흔적을 남긴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측면을 오는 8.15일 광복절까지 다루려 한다. 우리 역사와 백성들 안에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어떠하실 지 가늠해 보고 지금 여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행해야 할 회개와 쇄신의 방향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먼저, 해방 공간에서 미군정 통치하 남한 교회의 모습을 5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 미군정 3년간 남한 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 >
 
  1. 한국교회의 미군정에 대한 우선적 선택
  2. 교황청과 미국의 동반자적 관계
  3. 반공사상투쟁의 선두주자, 한국천주교회
  4. 한국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 
  5. 남한단독정부의 수립과 교회의 정치적 태도

교회의 전면적 정치개입주의

교회가톨릭운동의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청년>에서 가톨릭교회의 기본사상과 정책대안에 해당하는 논설들을 발표한 시점(1948년)은 교회의 정치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발판이 될 총선거가 치루어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한국교회는 일제식민지 시대처럼 ‘제한적이고 소극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에 대응해 오던 사목방침을 바꾸어 ‘전면적이고 적극적인’ 정치개입에 돌입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처음 얼마동안은 교회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첫째, 노기남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개인적 차원에서 미군정 및 이승만, 김구 등 정치세력과 교섭하였으며 둘째, 주로 종교적 차원에서 반공주의 사상투쟁에 몰두함으로써 우익 정치세력 안에서 신뢰감을 쌓아갔다. 그러나 1947년에 오면 교회언론을 통하여 새 국가건설에 대한 가톨릭적 대안을 제시하게 되고 1948년에는 세속사회에 대한 교회와 신자의 책임에 대하여 극력 강조하면서 ‘전면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목방침의 변화에 따라서 그동안 호교론적 차원에서 공언해 오던 정교분리, 정치불개입 원칙은 완전히 폐기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회사목정책의 원칙은 정교분리 그 자체가 아니라 교회를 보호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 "그때의 웃음은 어디로 가고…" 중국에서 갓 환국한 김구 임시정부 주석을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주장했던 백범 김구는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다. ⓒ 출전: <이승만의 삶과 꿈>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자신의 정치적 태도와 사목방침을 변화시킨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교황청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정치권력에 의한 박해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에 교회를 보호하는 방안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즉, 소극적으로 정치권력의 뜻에 수긍하고 협조하거나 아니면 정치권력에 직접 참여하는 방법이다. 해방 공간에서는 후자를 택할 수 있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미군정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을 통하여 세계적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었다. 세째, 한민당 등 우익세력과 연대할 수 있는 사상적, 인적, 물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었다. 네째, 교황청의 사목방침이 정치적인 개입주의로 바뀌었다. 다섯째, 전쟁 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어 적극적으로 방어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여러 원인이나 조건들은 서로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상승작용하여 한국교회가 총선거를 전후하여 정치적 참여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천주교회가 정치적 개입을 전면화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바로 가톨릭은 “민주주의의 기초요 배토(培土)”이며 “민주주의의 선봉”이라는 것이다. 실제 천주교회는 우리의 현실에 잘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더라도 역대 교황들의 숱한 사회회칙을 통하여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서 정치사상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천주교 신자들이 모든 방면에 진출하여 공산주의와 치열한 사상전을 전개하여 그리스도교 진리를 확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천주교 신자들은 교육계(장면 등), 문화계(장발 등), 노동계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개인적 차원이라고 할지라도 윤을수 신부는 노총을 대표하여 ‘국제자유노동연맹’ 결성식에 참여하였다.)

가톨릭시국대책위원회 결성

한국교회는 천주교의 對사회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고 총선거를 통하여 정치권에 진입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여야 했다. 따라서 교회는 1948년 벽두에(1월 11일) ‘가톨릭 시국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후속조치로서 그해 2월 중순에는 서울 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가톨릭운동에 관한 공문을 발표하고 김철규 신부를 서울교구 가톨릭운동의 지도자로 임명하게 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그동안 가졌던 가톨릭운동의 기본방침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47년 5월호에 실린 ‘우리의 사회관’이라는 글에서는 “기독교사회운동은 결코 정치에 간섭치 말 것, 일당일파(一黨一派)를 위하여 혹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진력하는 것이 없을 것, 그 사명은 여기 있지 않다. 자연권리와 복음율에 의하여 민중의 행복증진을 목적할 것이다”라고 권고하고 있다.(‘우리의 사회관’ 임예오 역, 그랜드 마이언, <가톨릭청년> 1947.5)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가 “지금은 행동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 것을 모토로 삼아서 가톨릭운동 조직들은 교권세력의 지원아래 해방직후부터 청년, 학생단체들을 필두로 하여 재조직되고 활성화된다. 특히 5.10 총선거를 전후하여 급속히 조직화되어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각 지방에 단위조직이 완료되었다. 이들 가톨릭운동 조직들은 대부분 반공운동에 전념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세력화에 동원되었다. 이는 교황사절 방주교가 “가톨릭운동이야말로 공산주의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라고 호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천주와 종교의 정당성을 인증(認證)하는 자에게만 투표하라”

1948년 5.10 총선거에 즈음하여 천주교회는 본격적으로 선거에 승리하기 위한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교황 비오 12세가 전후에 치루어진 이태리 총선거의 와중에서 이태리 공산당에 대항하여 가톨릭정권을 세우려고 범교회적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한 데서 정권참여의 정당성과 힘을 얻고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가톨릭청년>을 통하여 이미 그 자세한 내막을 소개한 바 있다.

교황 비오 12세가 1946년 3월 12일 성베드로 성전에서 이태리부인 4만명에게 동년 7월에 실시될 이태리 총선거에 대하여 한 강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강연 중에는 교황 재위 7년간이나 되지만 처음으로 간곡한 탄원의 구절이 있었다. 즉 교황은 부인들에게 “천주와 종교의 정당성을 인증(認證)하는 자에게만 투표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공산당에 대한 투표를 만류하야 “선거란 하나의 신성한 의무이다. 민족을 보양하고 민족을 보지하기 위하여 또는 가톨릭문화를 옹호하기 위하여 더욱 선거의 의미는 깊다”라고 소신을 피력하였다.(‘비오 12세와 정치’ 김락망, <가톨릭청년> 1947.)

앞서 살펴 보았듯이 반통일, 반민족 세력인 미군정과 이승만 계열의 우익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였던 당시에 총선거는 실로 분단으로 가는 첫걸음이자 결정적인 행보였다. 독립국가 건설의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된 이후에 이들 분단세력들은 총선거에 부심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중도파나 김구 등의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 와중에서도 북조선에서 제의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여 재차 협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들이 이북을 방문하게 되자 천주교회는 <가톨릭청년> 1948년 4월호의 사설을 통해 5월 10일 총선거를 앞두고 다시 협상을 논의하는 것은 모순이 많다고 반대하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선거전략: “가톨릭 후보를 국회로!”

천주교회는 선거를 앞두고 ‘가톨릭교회의 사회정치적 입장’을 두루 선전하기 위하여 <가톨릭청년>에 “가톨릭적 입장에서 각계(各界)에 보내는 말”을 여러 가톨릭 저명인사의 입을 통하여 발표하였다.(1948.4)

선거에 임박해서는 <가톨릭청년> 1947년 5월호에 “가톨릭 입후보자의 면모”라는 사설과 함께 장면을 비롯한 가톨릭신자 입후보자의 광고를 실었다. 이 광고에는 심지어 이북(李北)이라는 후보자의 경우에 “천주교 예비신자임”이라고 덧붙여 밝힌 뒤 잡지 하단에 투표용지를 그리고 친절하게도 이북의 칸에 공(0)표 찍은 사진을 싣고 있다. 장면(張勉)후보의 경우에는 몇 면에 걸쳐 그의 사람됨을 극구 칭찬한 뒤 “우리 가톨릭교회의 대변자 장면씨를 국회에 보내자!”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제 때 유명한 친일 선동분자였던 김활란을 적극 추천하였다.

교회가 적극적으로 가톨릭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바로 남한의 국가체제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고 반공 친미정권을 세우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투표자에게 고함’이라는 제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사상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이것이 민족지상명령일 것이다... 그러므로 5월 10일 총선거는 4천년의 우리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할 수도 있고 조국을 영원히 멸망의 심연에 던져버릴 수도 있는 생사기로에 선 사업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가톨릭신자에게는 이중의 의의가 귀중한 한 표 속에 존재해 있음을 강조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니 조국의 재건과 반공은 조선 가톨릭신자의 행동목표가 아니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한 표로 남북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놓고 무신공산주의를 구축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 놓자.

새로운 국회에 가톨릭의원을 보내야 하는 것은 췌언을 요치 않을 것이고 가톨릭후보자에 투표하지 못할 경우에는 교회당국의 지시를 받으라. 지난 18일 실시된 이태리선거에 앞서 교황성하께서는 신자들로서 취할 선거태도를 명시하였다. 우리의 교황 비오께서 이처럼 선거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확실히 우리에게 선거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가톨릭청년> 1948.5)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노기남주교가 중심이 되어 서울교구에서 6월 20일에 ‘독립촉구를 기원하는 대례미사’를 봉헌하였다. 여기서 독립이란 물론 단정수립을 말한다. 이 자리에는 교황사절 방주교와 노주교가 주례를 하였으며 이승만과 조병옥이 미사에 참례하여 답사를 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천주교회와 이승만 세력이 이 당시에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방주교와 노주교는 이승만에게 양보를 받아 정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종로 을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된 장면의 당선 축하회를 7월 18일에 열고나서 다음날 이승만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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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편집국장 200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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