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3년간 남한 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1)

민족사 안에서 흔적을 남긴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측면을 오는 8.15일 광복절까지 다루려 한다. 우리 역사와 백성들 안에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어떠하실 지 가늠해 보고 지금 여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행해야 할 회개와 쇄신의 방향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먼저, 해방 공간에서 미군정 통치하 남한 교회의 모습을 5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 미군정 3년간 남한 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 >

1. 한국교회의 미군정에 대한 우선적 선택

2. 교황청과 미국의 동반자적 관계

3. 반공사상투쟁의 선두주자, 한국천주교회

4. 한국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

5. 남한단독정부의 수립과 교회의 정치적 태도



▲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으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민족해방과 건국운동의 좌절 : 미군정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군에 의해 패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해방공간에서 한국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해방을 성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여 새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는 건국동맹을 조직적 모태로 하여 일제가 붕괴된 이후에 무정부 상태를 막기 위하여 ‘치안의 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의 결집, 교통, 통신, 금융, 식량대책의 마련’ 등을 목적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 결과 8월 15일 이후 3개월 만에 위원회는 가장 소규모 행정단위인 마을수준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아울러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익계열 뿐만 아니라 토착지주세력으로 볼 수 있는 송진우 세력까지 함께 할 의향을 갖고 있던 광범위한 규모였다

▲ 시민환영 받는 몽양 여운형 선생. 45년8월16일 휘문고 교정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몽양 (앞쪽 가운데).

그러나 남한의 경우에 미군이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자격을 박탈당하고 오로지 미군정만이 남조선의 새로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 뿐 아니라 ‘인민공화국’과 ‘중정 임시정부’ 등 모든 민족진영의 자발적인 조직에 대하여 불신임하고 미군정이 점령군으로서 당분간 남조선 전 지역을 통치한다고 선포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해방 당시에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갖고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통치기간 동안 줄곧 친일교회로 남아있었으며, 특히 태평양전쟁을 전후해서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등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물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변화된 상황에 긴급히 대처하려고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노기남 주교의 일지를 살펴보면 수시로 장면 등 교회인사들과 만나서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최고의 정책은 어찌 해서라도 교권을 보호하고 세력을 유지 확장하는 것이므로 사태의 진전을 살펴보면서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방향으로 무원칙하게 즉흥적인 태도를 보였다.

▲ 연합군 환영대회(1945년)

미군정과 한국천주교회의 첫만남 : 새로운 메시아, 미국

그러나 9월에 미군이 진주하자 1945년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세계 평화의 회복을 감사”하는 미사를 아놀드 군정장관 등 미군들과 봉헌하고 성당 뜰에서 미군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교회가 미군정과 만났던 첫번째 대면이었다.

뉴욕교구 스펠만 대주교는 이 당시에 군종사령관으로 함께 내한하여 이 미사에 참석하였다. 스펠만 대주교와 한국교회의 첫 만남은 한국교회가 아직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의 방향을 확실하게 선택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한국교회로서는 스펠만이 해방 당시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사업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교회를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자임하게 되어, 한국교회로 하여금 “미국과의 연대”만이 살 길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일제하에서 반미친일전선에 적극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적성국이었던 미국과 결합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 부역자들을 처단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한국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일제 총독부의 국가기구들과 공무원, 경찰들을 모두 유임시키는 바람에 남한에서 한국교회는 북조선에서와는 달리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더구나 스펠만 대주교와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은 미군정과 관계를 트는 데 도움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 스펠만 대주교 환영대회

미군정과 노기남 주교의 정치적 사귐의 시작

한편 미군정은 당장에 한국상황을 이해하고 정책을 전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였고, 한국교회는 미군정 안에서 교회의 입장과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래서 노기남 대주교는 아놀드 군정장관이 가톨릭 신자임을 감안하여 미군정 당국에 정치계 인물을 추천하고 교회가 바라는 바를 문서로 작성하여 직접 전달하였다.(1945년 9월 13일자 노기남 주교 일지 참조) 구체적인 증거로는 1945년 9월 23일자 노기남 주교 일지에 보면 “장면을 도학무부장으로 미리 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위기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가기 위해 정치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자신의 고문관으로 한국인 11명을 임명하였는데, 그 명단을 작성하는 데 노주교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 고문관들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던 민족세력과는 관련이 없는 친일지주 세력을 대변하는 한민당 계열 사람들로 채워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교회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친일지주 세력과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 이후 한국천주교회의 교권 세력은 미군정 당국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1945년 11월 1일 명동성당에서 아놀드 소장을 비롯한 수천명의 미군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몰한 미군을 위한 추도미사’를 봉헌하였다.

한편 한국교회 상층부는 이승만과 새롭게 교제를 트기 시작한다. 특히 당시 한국 교회의 실력자였던 윤을수 신부가 독립협회에서 이승만과 같이 일하였다는 점과 이승만과 교회가 미국의 영향권 안에서 교육받고 외교에 밝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구석이 많았다. 그 결과 노기남 주교는 주교관에서 이승만 환영만찬회를 갖고 나서야 (1945.11.30) 중정 임시정부를 환영하는 미사를 가졌다.(12.8) 그러나 처음 한 해 동안 교회는 미군정을 제외하고는 명백하게 어떤 정치세력과도 손을 잡지 않았다. 적어도 1946년 초반까지는 김구, 이승만 등과 신탁반대안에 합의(12.31)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부 모습. 왼쪽은 일장기가 내려가는 장면이고 오른쪽은 같은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가는 장면이다. 우리 국민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알고 열렬히 환영했으나 그들은 한국 국민들의 자유의사를 무시한 채, 점령군으로 행세했다.

미군정의 권력 장악 과정과 어부지리(漁父之利)하는 교회

미소 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미군정은 한반도에 친미적인 성격을 갖는 종속적인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미군정 장관은 친미 세력들을 중심으로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1946.2.14)을 거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1946.12.19)을 임명한 뒤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삼아 점차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권에 참여하게 한 뒤, 급기야 1947년 5월 17일에는 미군정청 한국인 기관을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하고 나서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한다. 이는 친미세력들을 내세워 임시정부를 이미 구성해 놓은 기초 위에서 공식적인 친미정권을 안전하게 세우려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정권에서 소외되었으며, 특히 사회주의적 성향의 단체는 물론 개인은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인민보」, 「자유신문」, 「현대일보」, 「해방일보」 등이 폐간되고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한국교회는 재정적으로도 미군정과 한민당 계열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당시에 한국천주교회는 일제 때부터 확보하고 있었던 많은 토지를 그대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북조선에서 1946년에 시행된 ‘민주개혁’으로 5정보 이상의 종교소유 토지가 몰수된 것과 비교할 때 미군정아래서 교회가 받은 혜택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미군정은 토지개혁 문제를 계속 유보하였으며 한민당 계열의 입법위원들이 주장한 바대로 “유상매상 유상분배” 원칙이 통과된 후에도 일제로 부터 귀속된 재산만을 처분한 까닭에 교회는 여전히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로 남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귀속재산마저도 미군정 및 미군정에 참여한 한민당,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 등에 가까이 있었던 자들에게 처분이 맡겨지는 바람에, 미군정과 적극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민당의 입장을 지지하던 교회 역시 귀속재산의 일부를 불하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인 예로 1946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사또병원(현재 평화방송국 건물)의 경우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와 각축을 벌이다가 결국 가톨릭 성모병원측이 차지하게 되었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가톨릭중앙의료원, 68면 참조)

한편 천주교회는 1946년 7월 22일, 남로당의 위조지폐 사건으로 폐쇄되었던 ‘조선정판사’를 미군정청에서 인수받아 ‘대건인쇄소’를 만들었다. 이는 그만큼 천주교회가 미군정청 안에서 영향력있게 로비활동을 벌여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한상봉 편집국장 2008-06-17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