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 교회역사 5]

 민족사 안에서 흔적을 남긴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측면을 오는 8.15일 광복절까지 다루려 한다. 우리 역사와 백성들 안에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어떠하실 지 가늠해 보고 지금 여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행해야 할 회개와 쇄신의 방향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먼저, 해방 공간에서 미군정 통치하 남한 교회의 모습을 5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 미군정 3년간 남한 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 >
 
  1. 한국교회의 미군정에 대한 우선적 선택
  2. 교황청과 미국의 동반자적 관계
  3. 반공사상투쟁의 선두주자, 한국천주교회
  4. 한국천주교회의 정치세력화 
  5. 남한단독정부의 수립과 교회의 정치적 태도

 

불행한 결실, 남한단독정부

5.10 총선거 이후에 당선된 의원들이 모여서 5월 31일에 국회를 구성하여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좌익단체들이 선거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의나 한국민주당 소속 의원이 강력한 여당을 형성할 만큼 되지는 않았다. 이는 훗날 ‘반민족자 처벌법’과 관련하여 정치적 홍역을 앓는 배경이 된다.

아무튼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서자 교황 비오 12세는 즉각 축전을 이승만에게 띄웠으며 1949년 4월 중순에는 교황청이 한국을 승인함에 따라서 교황사절인 방주교가 교황대사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로마교황청과 이승만정권은 확실하게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교가 이승만과 장면을 도와서 남한 단독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도록 사전에 로비활동을 한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한편 백범 김구는 자신의 통일의지가 현실화되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1949년 6월 29일 천주교회에서 대세를 받고(세례명: 베드로) 사망하였다. 김구가 가톨릭교회에 죽음 직전에 귀의한 것은 개인적인 친분때문이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 *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 : 1948년 9월 22일 반민법이 공포된 뒤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각 도에 조사부 책임까지 임명되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 행위자 7000여명을 파악하고 검거에 나서 화신산업회장 박흥식,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 살해한 이종형·김태석·이성근·노덕술, 친일 행위를 한 이광수·최남선 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광복후부터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친일파 세력과 일제 경찰 출신인 경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어처구니없게도 친일파들에게 연행되어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방 후 친일파 및 친일잔재 처리문제는 한명의 친일파도 처벌하지 못한채 역사속에 묻히고 말았다.

민족반역자 처단 문제에 대한 교회의 서로 다른 입장에 관하여

한편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한국천주교회의 ‘부일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태도이다. 미군정 아래서는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 미군정청의 입장에서는 한국인들의 민족적 관심보다는 군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관료층과 경찰조직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일제 때 공무원이나 경찰노릇을 하던 자들을 계속 기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민족자들에 대한 공방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군정의 지휘아래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모두 일제 때 부역했던 경찰들이었기 때문에 좌익세력이나 민족적 우익 세력마저 이들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또한 북조선에서는 이미 1946년에 반민족자들을 모두 숙청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사실이 끼친 영향도 컸다.

이러한 와중에서 한국교회는 총선거를 앞두고 독립정부가 수립되면 미군정에서 손대지 못한 반민족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과거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 입장에 서있다고 선전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의심스럽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아서 자신의 입장을 상당히 누그러뜨리고 있다. 즉, 일제 때 부역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웬만한 경우에는 용서해 주자는 투로 나온 것이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태도인가?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당연한 발언인가? 잠시 당시에 <가톨릭청년>에 게재되었던 자료를 비교해 보자.

(1) 「각국의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는 어떻게 처단되었는가?」 P.R.K (가톨릭청년, 1948.5. 35면)

해방 조선에는 독립(정부 수립)보다도 조급히 논의되었던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일제 36년간 그들과 협력하여 동족을 못살게 굴었던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의 처단문제였다. 해방과 같이 초래된 38양단군정의 실시는 우리에게 자주적 입장을 용허하지 않으므로 여론에만 그쳤을 뿐 아무런 실질적 처단은 보지 못하고 있다. 북조선에서는 소련적 견해아래서 많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숙청하였다. 그러나 남조선에서 미군정은 처단은커녕 일부 등용까지 하여 몰지각한 반민족적 도배를 날뛰게 하여 뜻있는 인사로 하여금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물론 남조선에도 이번 총선거로 정부가 수립된다면 처단은 될 것으로 믿어지는 바 논평을 피하기로 하겠다.

(2) 「건국은 기독정신으로」 (조원환, 가톨릭청년 1948.7 58면)

과거 日政시대에 우리의 독립을 방해한 반역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시대의 고관이나 공직자라 하여 모조리 공민권을 박탈하여 매장해버리는 것은 그 진짜 뜻이 어디 있는가? 학교교원과 같이 일본의 황국정신을 고취선양한 자 없으나 교원은 정권쟁탈의 적이 아니라하여 불문에 붙이고 爭權의 적인 前일본관리와 공직자만을 배척하는 그 심사야말로 애국자의 정신이라 할 수 없다... 과거 일정시대 특히 전시에 친일반미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전국을 편력하면서 다니던 남녀명사들이 금일 미군의 총애와 신뢰를 받고 있고 우리 동포들까지 그러한 명사들에게 아부추종하고 있는 사실은 어떻게 보는가. 외국인은 적국인과 결혼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아니한가. 혁명가가 모두 정치가가 아니고 어학에 능통하다하여 반드시 행정가가 될 것은 아니다. 터 닦은 자 어찌 목수가 될 수 있으며 목수가 어찌 토목이나 도배장판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강토는 적으나 대도량을 가져야 한다. 적국에서라도 그 장점을 수입하여야 하거늘 동포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모두 매장해 놓고 정권과 영예를 독점하려 하니 이런 야심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국가의 운영이 이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심을 버리고 애국 일로로 매진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3) 「헌법개정론은 어디로」 (김기영, 가톨릭청년, 1948.8 20면)

친일파 처단에 대한 제헌(制憲)정신은 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한 선열들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앙양하려는 데 있으므로 악질적인 반민족적 행위를 처벌하기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적법의 범위를 넓히고 도를 넘어 흥분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된다. 이와 같이 냉정하고 이지적이어야 할 마당에 정부 안에 잠입한 친일파만을 먼저 숙청하여 정부의 정화를 꾀한다는 것은 만인이 환영할 것이나 그 뒤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즉, 내각개조인 것이다.

이 글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쓰여진 것이었지만, 이 당시 <가톨릭청년> 등 교회 언론매체들은 모두 지도신부들의 감독아래 출간되었으므로 교회 상층부의 일반적 입장이라고 여길 수 있다. 특히 반민족자들에 대한 사항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였기 때문에 신중한 고려 속에서 발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 자료들은 유심히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총선 전에는 정치적 지지기반을 광범한 계급계층에게서 얻어내기 위하여 교회가 민족주의 세력인양 행세하였지만 총선이 끝나고 나서 국회의원이 확정되고, 7월 17일에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20일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5일에는 내각이 정해졌다. 따라서 7-8월은 정권의 핵심적인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서 단독정부의 향방이 가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미 헤게모니(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부역자들이나 지주적 기반을 갖는 우익세력들이 정권의 요직에 들어서자 좌익계열의 국회의원들은 이들을 성토하고 나선 것이다. 친일분자들이 어떻게 새 국가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민법을 적용하여 이들 의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일제하에서 관료로 활동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새 정부아래서 일을 할 수 없다면 인재들를 매장하는 처사라고 반대한다. 이것은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며 민족구성원들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이라고 비난한다. 이 당시 <가톨릭청년>을 잘 살펴보면 형제들을 ‘용서’하라고 권고하는 내용이 무수히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교회는 반민법 자체에도 의문을 갖고 있었으며 친일세력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 연행되는 반민족자 행렬

교회는 왜 반민족자를 옹호하는가?

그렇다면 교회가 왜 반민족자들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는가? 첫째, 교회 상층부 성직자 자신들이 일제하에서 부일경험을 거의 다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반민법은 교회의 도덕성을 위협할 염려가 있었다. 둘째, 교회에서 배출한 국회의원들 가운데 장면 등 몇 사람은 현저하게 일제에 대하여 협조적이었던 인사였다. 세째, 반민법의 확대적용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주로 좌익계열의 사람들이었다. 네째, 친일지주 출신이 많았던 한민당 및 독립촉성국민회의 인사들과 유대를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 또한 천주교인이 된다는 것은 반공주의자라는 보증수표였으며 반공주의자들은 미군정 및 새 정부 아래서 정치적 운신의 폭이 넓었기 때문에 이 당시에 많은 친일파들이 입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정확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교회의 물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교회가 이들을 적극 보호하려고 노력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좌익계열의 국회의원들은 국회프락치 사건을 계기로 하여 간첩으로 몰려 구속되고 반민족자들은 다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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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편집국장 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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