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겪은 북한교회의 분열과 아픔 (1)

민족사 안에서 흔적을 남긴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측면을 오는 8.15일 광복절을 즈음하여 다루려 한다. 우리 역사와 백성들 안에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어떠하실 지 가늠해 보고 지금 여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행해야 할 회개와 쇄신의 방향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이번에는 해방 공간에서 북한교회의 모습을 3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해방공간의 겪은 북한교회의 분열과 아픔

1. 해방공간에 대한 북한교회의 다양한 대처방식
2. 민주개혁과 북한 교회의 좌우 분열
3. 북조선기독교도연맹과 북한교회의 수난

해방공간에서 북한의 종교 현황

해방 이후 한국사회는 일제 잔재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앞두고 여러 정치세력들이 활거하는 무대가 되었다. 특히 북한사회는 남한사회와는 달리 기독교 세력이 대중성을 갖춘 커다란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어 이후 북한 인민정권의 수립과정에서 다른 사회주의 계열 정치집단과 극심한 대립과 고초를 겪어야 하는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해방 당시에 북한지역에는 대략 20만 명의 개신교인과 5만3천여 명의 천주교인이 존재하였다. 그 밖에도 불교도는 약 50만 명, 천도교도는 약 150만 명에 달했다. 이는 1946년 8월 현재 북한인구 9백 15만명을 기준으로 할 때, 개신교인은 전체 인구의 2.2%, 천주교는 약 0.6%에 해당했다. 이들은 전체인구에 비하면 별로 큰 세력이 아니었지만 종교세력들이 해방 당시 조직화된 집단으로는 가장 큰 사회세력이었으며, 특히 개신교는 지식층들이 많이 모여 있었으며, 천주교는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여 내적 결속력이 강한 종교집단이었다.

당시(1944년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서울, 대구, 평양, 함흥, 덕원, 전주, 광주, 춘천, 8개 교구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중 북한지역에 속하는 교회는 연길교구를 제외하고도 평양, 함흥, 덕원 교구와 춘천과 서울교구 일부가 해당된다. 당시 신부는 한국인 132명, 프랑스인 38명, 독일인 54명, 아일랜드인 10명이었다. 한편 교우들은 전체 18만 3천여 명 중에서 연길교구의 1만 7천여 명을 제외하고도 북한지역에 약 5만 5천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중 평양교구 신자가 가장 커서 약 3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소련군정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평양교구

평양교구는 1927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 신부가 평양감목대리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발전했는데,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적성국가였던 미국선교사들을 추방해버렸기 때문에 한국인 홍용호 주교가 교구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평양대성당은 후에 “소년궁정”으로 사용될 만큼 큰 규모였고 부설로 서포수녀원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평양교구 등 북한지역 천주교회에서는 남한 교회가 미군정하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는 북한사회의 집권층이 소련군정을 비롯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남한교회와 같이 우호적인 정치적 조건을 마련할 수 없었으며, 개신교와는 달리 신자의 주요기반이 남한에 있었기 때문에 대중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방 직후 천주교회는 직접적인 박해가 없는 한 교회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소련군정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이다. 이 당시 천주교회는 해방된 공간에서 신자층을 확장하고 신심을 고양하는 등 호교적 측면에 관심을 모았다. 해방 이후 북한교회는 매일미사 참여자 수가 해방 전보다 거의 10배가량 증가하는 등 신앙열이 고조되었다. 이는 신자총수의 10% 정도의 참여율이다. 한편 인민정권이 교회와 대립하기 시작한 1946년 이후에도 신심운동이 활발하여 1948년 1년간 영세자 수가 1,000명에 달하였다. 또한 1948명 봄 비밀리에 교구 성소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황해도 사리원 본당 전덕표 신부는 ‘79위 복자단 학생회’ 등 각종 신심단체를 활성화시켜 본당신자의 80%를 신입교우로 채웠다.

▲ 조만식선생 최후의 사진. 45년 9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북한 개신교회의 정치세력화

한편 신자기반이 북한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개신교 집단은 해방과 함께 가장 신속하게 정치적인 대응을 보였다. 해방 직후에 결성된 초기 자생조직 가운데 함경도를 제외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조만식), 황해도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김응순), 평북 자치위원회(위원장 이유필)는 모두 유력한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용복, 「해방 지후 북한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해방전후사의 인식> 5, 1989, 203-206쪽 참조)

이들 기독교 정치세력의 주류는 특히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평남건준으로 집결했고(1945.8.17), 소련군 진주 직후 북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와 합작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 개신교 정치세력은 북조선공산당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그해 11월에는 독자적으로 ‘조선민주당’을 건설하여 정치세력화를 꾀하였다. 이 당시 북조선 공산당의 당원수가 4,530명에 불과한데 비하여 조선민주당은 50만명 정도가 가입하였다(1945년 12월 17일 현재).(택정언, 「해방 이후 북한지역의 기독교」, <한국기독교사 연구> 제17호, 1987, 13쪽 참조)

이는 개신교회가 새로운 국가건설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적어도 해방 초기에 개신교세력은 그들의 대중적 조직력과 정치적 능력, 민족주의적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조선민주당의 “민족독립, 남북통일, 민주주의 확립”이라는 노선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과제와도 엇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6년 1월초 조선민주당은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싸고 조선민주당내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의 입장과 대립하게 되어 큰 위기에 처한다. 그 결과 1946년 2월에 열린 ‘북조선 민주당 열성자대회’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당수직을 사퇴한 조만식 등 우파세력이 축출되고 강양욱, 최용건 등 친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당 수뇌부를 차지한다.(이찬행, 「북한의 ‘조선사회민주당’」, <겨레의 길> 1991년 5월호, 163쪽 참조)

이 때 축출된 조선민주당 간부들은 대거 월남하여 같은 해 4월에 중앙당 본부를 서울로 이전시킨다고 선언하였다. 기독교정당들은 본래부터 당시 이북에서 전개되고 있던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도전하는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해방 직후부터 북한사회에서 교회는 적어도 잠재적인 반혁명세력으로 보이게 했다.(김흥수, 「해방 직후 북한교회의 실상」, <기독교사상> 1992. 8월호, 60-61쪽 참조)

종교인의 적극적 포섭 : 민족통일전선

한편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조선공산당은 민족통일전선을 강조하였다. 해방 초기에 개신교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정파는 해외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평안남북도를 거점으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국내로 들어온 사회주의세력은 국내에 대중적 토대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각계각층에서 동조세력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폭넓은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하여야 했다.

따라서 1945년 10월 10-13일까지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를 결정하고서 「새조선 건설과 민족통일전선에 대하여」라는 제하의 연설을 통하여 통일전선의 구축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과 농민 뿐만 아니라 민족자본가도 포함한 모든 애국적 민주역량이 참가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하여야 한다...지식층, 종교인, 자본가들도 비록 비조직적이나마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조직과 역량이 강화되면 될수록 그들도 분단된 상태에서 점차 조직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미루어볼 때, 우리는 현 단계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들을 무원칙하게 배격하여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김일성은 이미 자리잡고 있던 다른 정치세력마저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하였으며, 대중적인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현장지도’를 통해 대중들에게 설득력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1945년 11월 하순에 신의주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의주사건은 북한에서 기독교세력이 유난히 강한 신의주에서 일부 공산당 간부들의 오만과 횡포로 촉발되어 많은 사상자를 낸 반공 시위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지자 김일성은 사건 다음날인 11월 24일 저녁, 신의주에 도착하여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다음날 학생과 시민 앞에서 연설을 하였다. 공산당원에 대한 원성과 불만으로 흥분되어 있는 시민과 학생들 앞에서 누군가 “장군도 공산주의자입니까?”라고 묻자 김일성은 “그렇소, 나는 공산당원입니다”라고 밝힌 뒤 지방 공산당원들의 잘못을 규탄하고 사건의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유용성을 보임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의 도덕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대중들에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이종석, 「북한사회주의 정권의 성립과정」, <역사와 비평> 1988년 가을호, 23-24쪽 참조)

▲ 북조선여성동맹 강연회(1946)

천주교 평양교구에 대한 우호적 태도

한편 천주교회의 경우에도 해방 초기에는 행정당국과 큰 마찰을 빚지않았다. 소련군이 처음 진주하였을 때, 소련군 사령부는 천주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당시 평양교구는 일제 때, 빼앗긴 관후리 성지를 되찾고자 노력하였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소련군과 조만식의 협조를 받아 관후리 성지 회복문제는 순로롭게 진행되었으니, 1946년 3월 29일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한면수와 재단법인 평양구 천주교유지재단 홍용호 주교간에 매매계약서가 조인되었다. 또한 소련군은 12월 12일 천주교 소유로 된 경창리의 2의 2번지 대지를 포함한 인근 땅 총 2천 18평을 평양시 소유로 된 관후리 253번지의 1만 6백 33평의 대지와 바꾸어 주었다.(<천주교평양교구사> 180-185쪽 참조)

소련군과 인민위원회가 평양교구에 특별히 관대한 태도를 보여준 까닭은 무엇일까? 해방 당시 평양교구는 - 독일인 선교사가 많이 남아있던 덕원이나 함흥교구와 다르게 -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미 미국계 메리놀회 신부들이 모두 추방되어 한국인 성직자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축출된 미국인 선교사를 대신하여 홍용호 신부가 교구장을 맡은 지 겨우 2년(1943년 3월에 교구장이 됨) 밖에 안 되어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이 덜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해방 초기에 북한교회 지도자들은 1946년 초반까지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정치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개신교 정치세력과는 달리 정권장악을 둘러싼 경쟁상대가 아니었다는 점이 그들로 하여금 천주교회 - 특히 평양교구 - 에 대하여 비교적 우호적 태도를 갖게 만들었다.

인민정권과 대립하는 교회

그러나 개신교와 천주교는 근본적으로 반공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특히 천주교회는 남한교회와 부단히 연락하여 이미 미군정하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남한교회의 사정을 듣고 있었으며, 교회가 미군정의 협조아래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에 반하여 북한에서 인민정권이 무신론적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데 동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민족통일전선을 내세워 종교인을 포섭하려는 북한 정권의 노력은 천주교와 점차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반탁운동을 전개한 조만식이 체포되고 난 뒤, 김일성이 1946년 초 정권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그는 북한의 각 종교, 사회단체 대표를 초빙하여 자신의 정치노선을 적극 협력해 달라고 요구하는 모임을 가졌을 때, 초청받았던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는 자기 대신에 다른 성직자를 보냈다. 물론 그는 초대받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평양교구사> 194쪽 참조)

개신교의 경우에는 1946년 3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 사건을 통하여 북한 행정당국과 충돌하였다. 이날은 해방 이후 처음 맞는 독립만세 기념일이었는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교회의 단독행사를 중지하고 인민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기념행사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를 묵살하고 단독적인 기념예배를 강행하고 예배 후에는 십자가와 태극기를 휘두르며 “신앙의 자유와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소련군사령부로 항의행진을 하여 행정당국의 빈축을 샀다.(김흥수, 위의 글, 61쪽 참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한상봉 편집국장 2008-07-29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