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노동사목소위, AI 시대 '인간 존엄성'의 길 모색
"AI가 인간의 협조자가 아닌 적이 될 수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경고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 존엄성'을 중심에 둔 인공지능(AI) 기술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논의의 장이 마련됐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노동사목소위원회는 1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새로운 변화' AI와 노동 문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위원장 김선태 주교는 인사말에서 이번 토론회의 개최 취지를 밝혔다. 그는 "정부가 'AI 3대 강국'을 국정 과제로 삼고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있지만,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 노동자'에 대한 논의는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 주교는 "기술은 인간 노동에 유용한 도구로 쓰일 때는 '인간의 협조자'가 되지만, 인간의 창의성과 존엄성을 빼앗고 '기계의 노예'로 만든다면 '인간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이어 그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연설을 인용하며, 인공지능이 "소수의 이윤과 권력 강화"가 아닌 "인간의 안녕과 온전한 발전"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경제 권력이 AI를 이윤 극대화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노동자는 생존의 위기는 물론 감시와 통제 속에 '영혼조차 지배당할 위험'에 처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번 토론회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사태'로 다가온 인공지능 문제에 교회가 응답하는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 정희완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이 발제자로 나섰다.
"인공지능이 대체 못 할 전문직? '사무직'이 가장 위험하다"
장지연 연구위원은 'AI가 고용과 노동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인공지능이 노동에 미치는 영향이 (1단계)기술적으로 특정 과업을 대체할 수 있는지, (2단계)자동화(대체) 혹은 증강(보완)의 방식으로 적용되는지, 그리고 (3단계)사회가 이를 수용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사회·제도적 저항'을 고려한 '조정된 AI 노출도'(Adjusted AIOE) 개념을 소개했다. 이 지표는 직무의 책임성, 안전 책임, 인간 접촉 빈도 등 '보완성 지표'를 반영한다. 분석 결과, 기술적 대체 가능성만 보면 전문직과 사무직의 노출도가 높게 나타났지만, 사회적 보완성을 조정하면 전문직과 관리직의 노출도는 크게 낮아지고, 사무직은 여전히 높은 대체 위험을 보였다.
장 위원은 "전문직과 관리직은 인공지능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증강' 가능성이 높지만, 사무직과 판매직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자동화'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어 '탄광의 카나리아' 비유를 들어, 인공지능으로 인한 첫 번째 피해자가 "AI를 잘 쓰지 못하는 50대 이상"이 아니라, AI를 가장 잘 활용하는 '청년층'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 데이터에 따르면 인공지능 노출 직업군에서 청년층(22-25살) 고용은 6퍼센트 줄어든 반면, 중장년층(35-49살) 고용은 9퍼센트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업들이 불확실성 속에서 신규 채용을 중단하고, 인건비를 그래픽 처리 장치(GPU) 등 자본 투자로 돌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기업의 인사 채용과 업무 평가 등 절차에서 "'AI가 결정했다'는 식의 의인화를 멈춰야 한다"고 강조하며, "인공지능은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를 사용한 결과(예: 차별적 채용)에 대한 최종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기업)이 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공지능은 노동 통제 수단... 해고·승진 결정에 사용 금지해야"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자본 편향적 AI 활용'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2024년과 2025년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인공지능의 긍정적, 부정적 영향 모두 1년 전보다 커진 '양가적' 현상이 두드러졌다. '업무 시간 단축에 도움'을 받는다는 응답은 49.6퍼센트에서 58.4퍼센트로, '부족한 부분 보완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은 51.8퍼센트에서 65퍼센트로 늘었다.
반면 '일감이 감소하고 있다'는 36.1퍼센트에서 46.4퍼센트로, '일자리 상실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있다는 응답도 38퍼센트에서 41퍼센트로 증가했다. 특히 프리랜서나 플랫폼 등 비전형 노동자들이 임금 노동자보다 '일감 감소' 등 부정적 영향을 더 크게 체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인공지능 시대의 가장 큰 위험으로 '노동 통제' 문제를 꼽았다. 인공지능이 업무 관련 정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응답이 75.7퍼센트에서 82.8퍼센트로 늘었다. 이에 따라 '사생활 우려'(57.1퍼센트→64.8퍼센트), '나에게 불리한 결정에 대한 우려'(51.1퍼센트→57.7퍼센트), '업무 수행 압박 우려'(44.9퍼센트→52.5퍼센트) 등 감시와 통제에 대한 불안감이 전반적으로 크게 증가했다.
'AI 도입 활용의 제한·규제'에 대한 질문에서 노동자들은 분명한 '레드 라인'을 제시했다. '노동자 건강 모니터링'(30.4퍼센트)이나 '훈련 내용 결정'(22.8퍼센트)은 '제한 없는 허용' 의견이 높았지만, '해고할 직원 결정'(34퍼센트), '승진할 직원 결정'(28.1퍼센트), '채용할 직원 결정'(26.2퍼센트) 등 핵심 인사 영역에서는 '금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김 소장은 "인공지능이 과연 사회적으로 유용한 기술인가를 질문해야 한다"며, "채용과 해고 등 비생산적이거나 고용 관계를 악화시키는 영역에서는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감시하는 '편향성 감사' 도입과 인공지능이 아닌 기업에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법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인공지능, 노동의 공동체성 파괴... 교회의 '정치적 힘' 절실"
정희완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은 'AI 시대, 노동과 인간 존엄성에 관한 신학적 성찰' 발제에서, 인공지능 혁명이 인간의 '인지적·창의적 능력'까지 대체하면서 노동의 신학적 기초를 흔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가톨릭교회는 노동을 단순한 생계 수단(객관적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공동 창조 행위', 그리고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는 방식'(주관적 차원)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정 신부는 인공지능 시대 노동의 가장 큰 문제로 '플랫폼화로 인한 노동의 파편화'를 꼽았다. 그는 "알고리즘이 노동자를 배치·평가·관리하면서, 노동자는 더 이상 공동체 안에서 협력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되고 서로 경쟁하는 고립된 '데이터 단위' 혹은 '접속점'(node)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노동의 '사회적·공동체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인공지능으로 인해 '노동-소득-존재'의 연결이 끊어지는 시대에 교회는 '보편적 기본소득'(UBI) 논의를 포함한 '새로운 사회 계약' 수립을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회의 사명은 윤리적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며, "모든 사회적 운동의 동력이 사라진 오늘날, 역설적으로 종교의 사회적 힘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가 인공지능 시대의 불평등과 소외에 맞서 복음의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건강한 정치적 힘'이자 '사회적 동력'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고 촉구했다.
종합 토론: "정부는 인공지능 투자만... 피해 대책은 전무"
질의응답에서는 인공지능 시대에 소외되는 계층에 대한 대책과 노동조합, 종교의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오갔다.
한 참석자가 "AI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정부의 대책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김종진 소장은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판'과 '투명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웹툰 작가가 AI로 일자리를 잃었을 때, 한두 달치 지원금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로 전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교육과 기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일 등은 노사정이 참여하는 모니터링 기구를 운영한다"며, "한국 정부는 AI 도입에 수백 조를 투자한다면서도,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일자리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책은 없다"고 비판했다.
"초지능 개발을 멈출 수 있나?" 장지연 위원은 "초지능 AI 연구를 멈춰야 한다"는 주장에 비관적 입장을 보였다. 그는 "어느 순간 '이것이 초지능이다'라고 선 긋는 경계를 잡아낼 수 있을까" 반문하며, "그 시점을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막을 힘이 없다"고 답했다.
AI가 창출할 새로운 직업과 기본소득에 대한 질문에 장 위원은 "무엇이 없어질지는 말할 수 있어도, 무엇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프롬프트 엔지니어 같은 새로운 직종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에 있었지만, 그건 모두가 할 줄 알아야 하는 기술이지 직업이 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장 위원은 고용 총량이 줄지 않는 이유로 '자본주의'와 '사회안전망'을 들었다. 그는 "자본은 AI보다 사람이 쌀 때까지 사람을 쓸 것"이라며, "현 사회안전망이 대량 실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시점에야 비로소 '기본소득' 논의가 본격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향력이 약해진 종교의 역할에 대해 정희완 소장은 "모든 사회적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 역설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사회적 동력'으로서 종교의 역할이 더 커졌다"고 답했다.
장지연 위원은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 "노조가 AI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영화 '돈룩업'의 주인공들 같다"고 꼬집었다. 그는 "노조가 막대한 권력(힘)을 가졌음에도 스스로 약자라고만 한다"며, "적응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교육 기회를 주고, 끝까지 적응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 계약 재설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진 소장도 "노동조합이 임금 교섭에만 머물지 말고 '새로운 사회 계약'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며,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비정규직·실업자를 위한 교육 훈련 예산 투자를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AI 시대의 대안'에 대해 장 위원은 "개인은 적응하고 배우되, 조직은 '막아보자'는 잘못된 신호 대신 다가올 미래를 똑바로 가르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소장은 "모든 교구에 노동사목위원회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하고, 오늘 같은 논의 자리에 나이 드신 분들 외에도 20대 청년들과 함께 참여하는 노동사목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제안하며 토론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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