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에 개최했던 “아마존 특별 주교시노드”는 말 그대로 특별한 시노드였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이자 숨쉴 수 있는 생태계의 마지막 보루다. 이곳이 파괴되면 서로 연계해서 만들어 내는 산소의 동력이 파괴되고 이후 일어나게 될 모든 시나리오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마존의 중요성이 인류의 상식이 되었음에도 정작 아마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아마존을 지키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시노드는 “아마존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절규로 시작되었다. 아마존의 사람들은 아마존이란 문제에 끌려 들어간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교회는 이날을 특별히 “모든 봉헌자들(수도자를 포함한)의 날”로 기념하고 축하한다. 지금은 수도회마다 서원식을 제각각 다른 날로 정해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봉헌 축일이 오면 수도회들은 ‘서원 갱신식’을 갖고 서약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성당에서는 성전과 각 가정을 밝힐 수 있는 ‘초 축성’을 통해 자신을 태우며 빛이 되신 주님의 현존을 새롭게 돌아보는 예식을 갖는다. 여러모로 의미 있어 보인다.그러나 봉헌 축일이 어떤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든 오늘 율법의 주인이신 주님이 모세의 율법에 순종해서
사람마다 이해도가 다르다. 그래서 단둘이 얼굴을 맞대고 주고받은 이야기도 돌아서서 나오면 다른 이야기로 둔갑해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너에게로 건너가는 길은 강을 건너는 것만큼 모험적인 일이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아예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단정해 말했다. 처음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 관계 불능자인가 하고 오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불가능이라는 언어가 존재의 신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뭇사람들이 쉽게 ‘너’를, 그리고 ‘나’를 안다고,
2020년이 밝았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이 새해를 밝힐 해돋이를 찾아 산과 바다로 떠난다. 정확한 일출지에 발을 딛고 하늘을 물들이는 거대한 태양의 위력을 느끼면서 모두는 경건해지고 싶다. 올해는 바라는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간절히 간절히 빌기도 한다. 소망을 비는 기도는 해돋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해에 처음 맞는 보름에도 사람들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 그러나 태양과 달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 과학으로 무장된 영악한 현대인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들은 태양과 달에 빈 것이 아니다. 그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가족 해체와 재구성을 경험하는 국가가 되었다. 서구에서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되어 온 인구혁명이 우리는 불과 30년 만에 전통가족 개념을 허물고 1인 가구, 비친족 가족이 1위로 등극할 전망이다. 통계청의 '2018년 출생 통계 확정'(2019.11.28)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08명으로 줄어서 인구유지에 필요한 합계출산율(대체출산율) 0명대로 떨어졌다. 이런 수치는 OECD 회원국 중 한국이 유일하다. “이혼, 결혼기피, 저출산, 다문화, 성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생물 종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 한번 멸종된 생물은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히 인류 곁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꼽히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 역시 지도 위에서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우린 그 섬들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섬 아홉 개로 이루어진 투발루는 해수면 상승으로 이미 섬 두 개를 떠나보냈다. 삶의 거처를 잃은 주민들에겐 ‘기후 난민’이라는 딱지가 돌아왔다. 이들은 주변 부자나라 호주에 받아들여지길 간청했으나 그마저도 거절당했다.일찌감치 위태로운
예수의 십자가 옆에 두 죄수가 함께 매달려 있다. 한 죄수는 예수에게 조롱을 퍼부었지만 다른 죄수는 그를 나무랐다. 놀라운 점은 이 죄수가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같은 죄수(?) 예수를 알아보고 그의 최후 변론자요 증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낙원이 ‘선생님의 나라’임을 알았고, 예수는 그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루카 23,42-43)이라 화답한다. 예수의 ‘낙원’에 대한 발언은 그의 첫 공적 무대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말해지고 행동으로
프로이트는 인간의 위선이 자신의 본래적 욕구와 충동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없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인식한다. 욕구와 충동은 그 자체로 선악과 무관한데도 사회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비난부터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도덕적 강도는 높아지고 이에 부응할 수 없는 사람들은 위신과 체면으로 도피한다.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모형의 틈새에 끼어서 온전히 자신이지도 못한 채, 자신일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불안(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 역시 설정된 모조
칼 라너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한 교회 비판은 물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역으로,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이론화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사회적 책임에 수세적으로 일관했던 교회가 이후 좀 더 진일보한 전향적 태도를 갖추게 된 것도, 교회의 편협한 구원관을 세상 밖으로 옮기는 데 틈새를 벌려 놓은 것도 그의 공로를 배제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가 제기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천년 주장이었던 ‘오직 교회 안에서만의 구원’을 달리 생각하는
나의 사견이긴 하나, ’존재‘를 사유한 시 중에 김춘수의 ’꽃‘만큼 탁월한 시는 없을 것 같다. 시인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그‘가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자신에게 다가와 꽃이 된 존재를 노래한다. 예수의 비유 중에 이례적으로 이름이 호명된 ’라자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사 가장 존재감 없는 자였다가 불리운 자 되었으니, 그간 자기 이름을 걸고 으스된 여타 존재들이 일순 무색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라자로는 죽어서 한 인격체요 개별자로 아브라함 품에 안겨 되살아나지만, 부자는 존재(이름)도 없는 무명씨로 전락해 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들, 더는 이용 가치가 없으면 안면몰수하는 사람들, 마녀사냥을 취미로 즐기는 선량한(?) 사람들, 그런 이웃들 속에 당신과 내가 있다. 당신과 내가 가끔은 그들과 한패여서 우린 서로를 믿을 수 없고 그래서 불안하게 떠돈다. 어느 날, 나와 당신이 마녀로 몰리는 상상, 돌팔매질당하는 상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우린 불가능한 꿈을 꾼다. 그런 나를 끝까지 믿어 줄 사람, 배반을 모르는 사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기대한다.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는 상상, 내
상류층 세계의 잘나가던 젊은이, 샤를 드 푸코를 결정적으로 무너트린 말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었던 예수의 마지막 자리”였다. 모든 것이 잘 보장되어 있던 젊은 귀족 청년의 미래가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이후 예수를 닮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푸코가 걸어 들어간 종착지는 사하라 사막의 ‘뚜아레그 부족’이 되었다. 거기서 그는 중심의 세계를 벗어난 영원한 아웃사이더,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 생을 마쳤다.예수가 초대받은 이에게 던진 ‘마지막 자리’는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자”,(루카 14,11) 자기 인식에서 자유로운 자가 차지
오늘 예수의 발언에는 평화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언급한다.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주님의 평화'(Pax Dominum)가 일순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예수는 왜 이렇게 강경한 발언을 던졌을까?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완벽한 상태는 평화일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평화만큼 오해를 불러일으킨 말도 없다. 모든 이가, 모든 국가가 평화를 갈망하나 유사 이래 평화로웠던 시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어디선가 늘 분쟁이 있었다는 소리다. 지금도 전쟁광들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Jose Mujica)는 매우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아간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으로 소개되는걸 원치 않았다. 그에게서 ‘빈곤한 사람’이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가 탐욕자를 빗대어 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예수가 탐욕을 경계한 것은 ‘하나뿐인 생을 재물에 목숨 거는‘(12,15) 어리석음도 있겠지만, 아마도 탐욕이 끼치는 해악 때문이었을
올해는 한국가톨릭교회가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발족한 지 25주년을 맞는 해다. 얼마 전엔 이를 기념하는 ‘담화문’도 발표되었다. 교회가 농촌살리기에 전격 뛰어든 계기는 1993년의 우루과이라운드가 핵폭탄처럼 세계를 강타한 이듬해였다. 당시 전국 농민들의 격렬한 투쟁 선봉은 온 국민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고도 남았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아시아와 남미 국가들에게는 더 말할 수 없는 치명타가 되었다. 단지 경제적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자유시장경제가 지구 전체를 뒤덮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예수의 일흔두 제자 파견은 언제 들어도 비장함이 묻어난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리 떼로 들어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예수는 왜 제자들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지니고 가지 못하게 했을까?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많이 준비해서 보내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가 한 말은 군더더기 없이 간단하고 단호하다. 덧댈 변명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현재 있는 그대로 떠나라는 것, 앞일을 대비하지 말라는 것, 지인들과의 관계로 발목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 누군가에게 신세 지는 일조차 받은 소명과 부합되지 않으면
시지푸스의 형벌은 무한반복에 있다. 이 형벌이 무서운 이유는 이토록 힘겹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아무 의미 없이 지속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한민국이 겪는 온갖 치명적인 병 중심에는 어쩌면 이런 무의미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국민은 생존할 만큼 벌어들이고, 죽지 않을 만큼 보장된 체제 속에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훈련받는다. 일자리든 교육이든 체제가 만든 체스판에 올라탄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낙오되어야 하는지, 더는 앞으로 진전할 수 없는지, 왜 모두는 톱니에 맞물린 바퀴처럼 굴러가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체제는
유다를 뒤흔든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졌다. 그날이 전한 기이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성령이 세찬 바람”으로 사도들이 모여 있던 집 안을 강타하고 연이어 “불꽃 모양의 혀가 사도들 위로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예수가 떠난 자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성령의 첫 번째 형상은 그 익숙한 ‘비둘기’가 아니라 지금 들어도 매우 낯선 ‘불꽃 모양의 혀’였다. 이 일로 확연히 달라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알고 지냈던 ‘그저 그런 사람들’(사도 2,7)이 아니었다. 그들이 광장 한가운데로 나서서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종교마다 자신을 대표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불교는 ‘자비’를, 그리스도교는 ‘사랑’, 힌두교는 ‘진리’, 이런 식이었다. 어렸을 때 각인된 이 문구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내가 믿는 신은 사랑의 신이며, 모든 신도는 서로 사랑한다면서 ‘사랑’을 그리스도교의 전유물로 여겼다. 나이가 들어 수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어느새 점점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 일이 줄어들었다. 사랑의 진짜 전문가들은 교회가 아니라 모두 가요계에 몰려 있는 듯했다
오늘 요한의 복음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요한 복음에서 “안다”는 동사는 다른 무엇보다 요한 복음서를 여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한다. 27절에 나타난 동사들 역시 ‘알다'(인식하다)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양상들(‘알아듣다, 알다, 따르다’)이다. 요한 복음은 장중한 서문의 중심을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었는데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도 못하였고, 맞아들이지도 않았다.”(요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