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6월 9일(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 2,1-11; 1코린 12,3ㄷ-7.12-13; 요한 20,19-23

유다를 뒤흔든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졌다. 그날이 전한 기이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성령이 세찬 바람”으로 사도들이 모여 있던 집 안을 강타하고 연이어 “불꽃 모양의 혀가 사도들 위로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예수가 떠난 자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성령의 첫 번째 형상은 그 익숙한 ‘비둘기’가 아니라 지금 들어도 매우 낯선 ‘불꽃 모양의 혀’였다. 이 일로 확연히 달라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알고 지냈던 ‘그저 그런 사람들’(사도 2,7)이 아니었다. 그들이 광장 한가운데로 나서서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은 사도들 자신에게도,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낯선 풍경이었다. 이런 일은 미리 예상을 해서 각본을 짜고 실행에 옮기는 우리네 방식이 아니었다. 느닷없고 당혹스러우며, 설명이 불가하고, 그래서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술’한 사람 취급을 받았고(사도2,13), 베드로는 한사코 자신이 취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는 이제껏 보여준 일이 없었던 ‘리더’의 면모로, 교회의 수장으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지상에서 예수가 보여준 비전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것인지를 알리는 세기적 선포요, 아직은 미완의 성취였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그날에 나의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사도 2,17-21)

모두는 비전가요, 신비가며, 예언자로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은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며, 아들(남자)에게만 유보되었던 특권은 딸과 노예들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질 것이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은 모두 새로운 세계를 열 주역이 되었다. 성령강림이 보여주는 힘은 가부장제로 장악된 세계의 구조를 혁명적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뒤엎는 강력한 물결로 등장했다. 그 세찬 기운이 세계의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처음엔 유대 땅에서, 이후엔 전 세계로 뻗어 나갈 것이다. 성령의 힘을 입은 사도들은 열정적으로, 혹은 영웅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하며 전 세계를 종횡무진할 것이다.

 

성령 강림 (이미지 출처 = pixbay.com)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작은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초기교회 공동체가 이교도들에게 안겼던 가장 커다란 놀라움은 차별이나 배제가 없는 ‘동등성’에 있었다. 이것은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으며 (…)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갈라 3,28)라고 한 당시 세례정식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도 베드로가 외친 성령의 첫 번째 일성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서간 여기저기서 ‘딸들과 남녀 종’들은 점차 회중들의 모임에서 조직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동등 제자직에 대한 사목 비전은 결국 통째로 부정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유는,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하느님나라는 사실상 그 나라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사도 바오로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점점 더 투명 존재가 되어 갔고, 얼굴도 목소리도 거세된 채 제도의 그늘에서 살아가도록 강제되었다.(1코린 14,33-35; 콜로 3,18-22; 1베드 2,18-3,7) 서간에 따르면 여자가 공적으로 나서서 안 되는 이유는 모두 여자(하와) 탓이었다.(1티모 2,11-15) 여자에 대한 이런 사고는 점차 광적으로 왜곡되어서 마침내는 마녀사냥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공식적 재판기록만 보더라도 중세와 근대를 걸쳐 화형에 불태워진 여자들은 수십만에 이른다. 이런 학살의 배경에 뿌리 깊은 원죄의식이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이제 야만적인 세월이 지나고 마녀사냥도 없어졌으나 여전히 여자에 대한 정신적, 물리적 폭력과 강간, 살인은 단 한 번도 지구상에서 멈추어 본 일이 없다. 세상의 여자들은 역사를 타고 흘러내린 이 폭력의 인장을 온몸에 두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내야만 했던 생존의 여성들이 살아서 처음 사도 베드로가 선포했던 성령의 생생한 비전을 다시 복구하고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물론 20세기 이후 밀어닥친 여성주의의 물결에 당황한 교회가 여성과 관련된 발언을 이어왔으나 실은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주목받은 일은 없다. 차별을 구조화하는 진짜 원인은 건드리지 않은 채 긴 수사적 나열이 어떻게 감흥을 불러올 수 있겠는가. 하느님이 어찌 우월과 열등의 컨셉으로 여자와 남자를 지으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발상이야말로 하느님을 차별과 억압의 신으로 얕잡는 일이 아닌가?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린 ‘언어’의 은사는 분열(바벨)의 언어를 몰아내고 새로운 영의 언어로 ‘내 백성’을 복구하라는 명이었다. 오늘 성령은 다시 교회의 등을 떠밀어 광장에 세우고자 한다. 교회는 광장에 나서서 세상에 대고 이 모든 사실을 ‘보고 들은 자’로서 말해야 한다. 성령은 이렇게 말하고 증언하라고 ‘불 혀’를 내린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누구도 억울하게 말 못하고,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는 자로 구천을 떠돌아선 안 되는 것이다. 성령의 언어는 무미건조한 중립적 언사가 아니다. 성령의 언어에는 고통받는 이들이 보인다. 성령의 언어에는 그들이 살아 있으며, 그들이 말하고, 그들이 희망한다. 성령의 언어에는 받은 상처가 아물도록 함께 하겠다는 결의가 있다. 어쩌면 여자와 노예들은 다시 살아온 만큼의 긴 세월을 견뎌야 할지 모른다. 이런 일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어서 쉬이 지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이 대열에 꿈꾸는 자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 교회에 내린 주 예수의 평화와 용서가 성령의 힘으로 만천하에 제대로 드러날 수 있길 소망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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