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6월 23일(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창세 14,18-20; 1코린 11,23-26; 루카 9,11ㄴ-17

시지푸스의 형벌은 무한반복에 있다. 이 형벌이 무서운 이유는 이토록 힘겹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아무 의미 없이 지속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한민국이 겪는 온갖 치명적인 병 중심에는 어쩌면 이런 무의미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국민은 생존할 만큼 벌어들이고, 죽지 않을 만큼 보장된 체제 속에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훈련받는다. 일자리든 교육이든 체제가 만든 체스판에 올라탄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낙오되어야 하는지, 더는 앞으로 진전할 수 없는지, 왜 모두는 톱니에 맞물린 바퀴처럼 굴러가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체제는 그들이 물을 수 없도록 싸움판을 만들고,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하며, 판정은 자기 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믿게 한다. 체제가 그렇게 무한 반복 엔진을 가동할 수 있는 것은 판에서 떨어져 나가면 ‘죽는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체제는 결국 안전하게 굴러갈 것이다. 이 거대한 쳇바퀴에 매달린 사람들이 여전히 두려워하는 한에서만 말이다.

사람들이 꾸는 꿈조차 그들이 내민 광고판에 매달려 있다. 광고판에는 인간적 품격을 갖춘 것들이 우아하고 엘레강스한 자태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그곳엔 먹을 것, 입을 것, 거주할 집, 자동차, 온갖 안전 보험에 둘러싸인 멋진 아내와 남편, 아이들이 웃고 있다. 행복은 내 거실이 아니라 그들의 거실에만 존재한다. 저들은 매일 반복적으로 나타나 남루하고 비루한 내 일상을 비교해 보여 주며 이제 그만 그런 인생을 끝내라고 종용한다. 손만 뻗치면 당신은 이렇게 멋진 일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가야 할 목표와 꿈에 대한 설계는 끝났다. 돈만 있으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버틸 요량으로 집을 나서고, 괴물이 벌린 거대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간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일이다. 그것이 오늘 내 가족의 뒷모습이 아닌가.

무한반복의 형벌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는 품지 말았어야 할 의문을 품고야 만다. 이런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우린 왜 온갖 것을 다 갖추고도 텅빈 허무에 시달려야 하는지, 끝도 없이 추락하는 두려움에 쫓겨야 하는지, 그만 생각하고 만다. 시지푸스는 자신이 받은 형벌의 실체를 묻지 말았어야 했다. 시지푸스적 생각의 순간, 무한 반복이란 형벌의 조건을 생각하는 순간, 시지푸스는 비로소 자기 고통과 맞닥트린다. 시지푸스가 형벌의 모순을 깨달은 것이 잘못된 일인지, 그저 모르는 채 무한반복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일인지,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 신화는, 생각할수록 불편한 이 신화의 물음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사라지거나, 끊임없이 따라붙으며 대답을 재촉한다.

'시지푸스', 프란츠 슈투크. (1920)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온라인을 달구는 뉴스들은 광고판과 달리 한결같이 무섭고 끔찍하고 잔인한 소식들로 넘쳐난다.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자녀가 부모를 죽인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도 멀쩡하다. 어떤 경우의 폭력과 살상엔 이유조차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삶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고장 난 걸까? 오늘 복음은 이런 세상에 조금이나마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가톨릭 신자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예수의 “빵의 기적”은 오늘 우리에게도 기적이 될 수 있을까? 황량한 벌판, 잠자리는 물론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곳, 가장 기본적인 생존마저 거부당한 이곳에서 삶은 가능한 걸까?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고단한 하루의 사람들이었다. ‘군중’이란 표현은 그런 것이다. 병고와 가난에 지친 사람들, 내세울 생이 특별할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는 이미 당신을 찾아온 이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추측컨대 그날, 그들이 예수와 함께 보냈던 그 ‘하루’(카이로스)는 무척이나 강렬했던 것 같다. 군중은 늦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예수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맘때쯤이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단순히 그날 저녁 광야에서 이루어진 기적적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특별하고 판타스틱한 이야기엔 무한반복적 기계주의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광야에서 이미 자신들의 비루한 삶의 욕망과 맞닥트렸기 때문이다.

예수는 스스로 이 기적의 무대를 독식한 영웅도, 혼자 박수받는 주인공도 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기적이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그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건넨 제자, 혹은 소년, 군중 속의 ‘그 사람’들이 당신 기적의 파트너가 되게 한 것이다. 예수는 그 사람의 것을 건네받고, 다시 수천의 그들에게 빵을 건넴으로써 무한 반복(무의미의 형벌)의 시간을 깨트렸다. 빵의 기적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군중’이지 않다.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광야는 더 이상 불모지도, 버림받은 땅도 아니게 되었다. 하느님의 시간은 그렇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는 교회는 한 번쯤 이 축일이 가리키는 진짜 의미를 생각해 볼 일이다. 혹시 모두는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변화”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사 이후 돌아간 삶의 터전은 같은 기적과 경이의 장이 되고 있는지 가끔은 물어볼 일이다. 일상의 안부처럼.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