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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구에 온 이유[강신숙 수녀] 8월 4일(연중 제18주일) 코헬 1,2.2,21-23; 콜로 3,1-5,9-11; 루카 12,13-21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Jose Mujica)는 매우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아간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으로 소개되는걸 원치 않았다. 그에게서 ‘빈곤한 사람’이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가 탐욕자를 빗대어 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예수가 탐욕을 경계한 것은 ‘하나뿐인 생을 재물에 목숨 거는‘(12,15) 어리석음도 있겠지만, 아마도 탐욕이 끼치는 해악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유아독존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싫든 좋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또 내놓아야 한다. 자연의 이치는 주고받는 거대한 순환 속에서 생명을 이어 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환의 사이클을 독식하는 일은 중대한 범죄다. 지구 전체를 위기에 빠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탐욕자의 곳간은 단지 화폐로 환산되는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미래가 신의 영역이라는 것도 단순히 인간의 운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셈할 수 없는 수많은 대지와 생태계의 사슬이 함께 포함된 영역이다. 누가 이 연결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누가 이 연결고리에 빚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연결을 끊은 부자가 듣게 될 소리는 “오늘 밤에 목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요, 그가 지키고자 했던 곳간의 재물은 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루카 12,20)이 될 것이다. 예수가 경계한 탐욕의 메시지는 이렇게 단순하다. 그는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인간론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인간이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과 그 행복을 지키는 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언론 매체들이 쏟아내는 대한민국 경제불황과 저출산, 에너지 문제를 접하다 보면 내일 이 나라가 당장 고꾸라진다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온갖 전문가 집단을 동원해 인용한 진단과 통계를 듣다 보면 우리 경제는 이미 십수 년 전에 끝장났어야 했다. 문제는 이런 자극적 언어 패턴이 지속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끼치는 결과적 해악이다. 이들은 경제가 우리 각자의 행복을 담보해 주는 ‘신’이라도 되는 양 국민을 선동하고,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며, 살 의욕을 꺾는다. 물론 실제로 빈부격차나 실업률, 질병, 고령화가 삶의 질적인 면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현상의 진짜 원인은 알려주지 않은 채 거짓 정보만을 늘어놓는다는 데 있다. 애초부터 그들은 인간이 누릴 지속 가능한 미래, 평등한 나눔과 보살핌 같은 데에는 관심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진짜 위기는 환경이 아니라 정치적 위기다. (이미지 출처 = Flickr)

현재의 대한민국처럼 살기 위해선 지구 세 개가 더 필요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만일 70-80억 인구가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산다면 우리 지구는 얼마를 더 버텨 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글로벌’이라 하는 ‘시장경제’이고, 온 인류가 이 파괴적 망령에 취해 생겨난 일이니 한탄한들 지구를 구할 뾰족한 방도는 없어 보인다. 여전히 사람들은 ‘대량생산과 소비’에 취해 있다. 이 뻔한 선전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수세식 변기를 재래식으로 돌릴 엄두를 못 내듯 말도 안 되는 문명(?)에서 돌아갈 길을 잃은 것이다. 광풍으로 몰고 간 개발의 추동도 탐욕에서 빚어졌고, 그 탐욕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국제법이니 국제기구니, 정책이니 하는 따위들을 만들어 내고, 그 위로 시장경제가 올라탔으니 우리는 한동안 그들이 던지는 세계화에 취해 지낼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필시 오늘을 내다본 것이 틀림없다. ‘먹고 마시며 즐긴’ 자에게 돌아올 말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루카 12,19-20) 외에는 없는 것이다.

201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국제정상회담에서 호세 무히카가 한 발언은 이런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 그가 한 연설은 회담장에 모인 세계 정상들의 폐부를 훑고도 남았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의문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후 내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 왔습니다. 과연 우리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현재 잘살고 있는 여러 나라의 발전과 소비 모델을 흉내 내자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독일 가정에서 보유한 자동차와 같은 수의 차를 인도인이 소유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숨쉴 수 있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을까요?” 그리고 이어진 연설에서 그가 꺼내 든 제안은 “문명의 전환”이었다. 우리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자는 것이다. 진짜 위기는 환경(경제, 수자원)이 아니라 정치적 위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떠받들자고 지구에 온 것이 아니다. 코헬렛의 말대로 인생은 짧고 허무하며, 눈앞에서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앞으로 달려가느라 놓치고 있었던 ’행복‘을 되찾아 와야 한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미세한 생명력들에 눈을 돌리는 일, 그곳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 공기와 숲, 강과 바다, 대지를 숨쉬게 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마사 베크의 말처럼, “쓰레기들을 소중히 지키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것, 진짜 보물들을 내다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문명의 전환이란 새로운 동력을 추동할 새 인간의 출현을 말한다. “거짓말을 멈추고, 옛 행실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것”(골로 3,5; 루카 12,15)이다. 이 야만의 시대를 끝낼 유일한 희망도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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