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9월 15일(연중 제24주일) 탈출 32,7-11.13-14; 1티모1,12-17; 루카15,1-32 또는 15,1-10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들, 더는 이용 가치가 없으면 안면몰수하는 사람들, 마녀사냥을 취미로 즐기는 선량한(?) 사람들, 그런 이웃들 속에 당신과 내가 있다. 당신과 내가 가끔은 그들과 한패여서 우린 서로를 믿을 수 없고 그래서 불안하게 떠돈다. 어느 날, 나와 당신이 마녀로 몰리는 상상, 돌팔매질당하는 상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우린 불가능한 꿈을 꾼다. 그런 나를 끝까지 믿어 줄 사람, 배반을 모르는 사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기대한다.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는 상상, 내 꺾인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할 그런 영화 같은 사람을. 우리 모두는 한 번쯤 그런 사람이 그립고, 그 빈자리를 마음 한켠에 둔 채 살아간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나타나는 모세, 바오로, 예수의 신(내가 지금 믿는 신은 잠시 젖혀 두자)은 그런 희망을 품게 한다. 그들 신의 특징은 ‘신실함'(Hessed)으로 배반하지 않는 사랑, 약속을 지키는 신의라 말한다. 왜 그렇겠는가? 그 중심을 이루는 힘이 자비와 연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신실성과 충돌한 때는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였다.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에서 힘겨운 횡단을 감행하던 이스라엘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잠시라 쳐도 모세의 부재는 위태로운 이스라엘에 틈새를 벌리는 빌미가 되었다. 참았던 의혹과 불만이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이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의혹을 잠재울 무엇, 이 고난을 끝낼 더, 더 강력한 존재자다. 유혹은, 정교한 타락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변명 가능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법, 모든 배반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8) 하고 말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명분만 놓고 보면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이집트 땅에서 구원한 신에 대한 경배이니 ‘수송아지’가 무슨 대수랴. 수송아지는 그렇게 두려움과 불확실성 속에서 태어난다. 이전의 신을 믿을 수 없어서 만들어진 이 신은 경배 대상으로 보이지만, 실은 사람이 제 입맛대로 부리려 만든 모조품이다. 신을 빚어 만든 자니 제 스스로 신이 된 것이다. 해방의 신이 우상과 대체됨으로써 생겨난 갈등구조는 개인과 집단이 각자의 득실을 고려한 욕망과 절충해서 일어난다.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조종된 힘의 결과는 이렇게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생각은 하느님인데 엎드려 절한 대상은 수송아지다.

다마스쿠스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오로. (이미지 출처 = Flickr)

하느님이 이를 그대로 두고 보실 리 없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이제 막 걸음을 떼고 있는 신생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자들에게 순순히 물러설 신이 아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그럴 만한 상황을 꾸짖는 데에 있지 않다. 그 상황을 위험에 처하도록 만든 “참으로 목이 뻣뻣한”(탈출 32,8) 완고함(혹은 깨닫지 못함)에 있는 것이다. 타락은 성실로 포장된 완고함이고, 완고함은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진리니, 예수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을 사정없이 꾸짖은 이유도, 바오로가 고백한 자신의 처절한 죄의 내용도 조금은 수긍이 간다. 이런 완고함이 일으킬 공동체의 해악이 어떤 것인지, 그 미래가 어떤 불행으로 나갈지가 뻔히 보이는 때문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리라.”(10)

바오로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물불 가리지 않고 ‘타락한 이교도들’(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는 데 광분했다. 당시 그의 모습을 보면 얼핏 오늘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터뜨렸던 분노와 매우 흡사해 보인다. 그런 그가 훗날 이런 고백을 내놓았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1티모 1,13)라고, 자신을 ‘하느님 학대자’로 고백한 것이다. 그가 신생 그리스도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마주친 신의 음성이 그러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주님의 정체가 자신이 단죄한 예수라니, 예수가 타락한 이교도라니, 사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신에 대한 혼란은 사울 자신에 대한 혼란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지켜 왔던 진리의 세계(성경과 전통)가 처참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다. 그런 바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한없는 인내”(1티모 1,12-16) 때문이었다. 연민이 제거된 종교적 충실성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헤세드’가 왜 단순한 종교적 레토릭으로 끝나선 안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예수는 처음부터 신뢰를 저버린 자들의 친구였다. 세리와 죄인들, 빗나간 아들을 ‘괜찮다, 괜찮다’ 하며 기다리는 이였다. 모든 걸 잃을 각오로 위험에 처한 양을 찾아 나서는 이, 찾아서 반드시 품에 안고 돌아오는 그런 이였다. 그 기쁨이 얼마나 폭발적인지, 얼마나 눈물 나는 일인지는 그의 비유 속에 잘 녹아 있다.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살아가느라 지친 우리에게도 그가 다가온다. 별 감동이 없던 헤세드,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몰라 의심에 찌든 나에게 그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나는 네가 믿을 수 없다며 떠났던 그 자다. 타자를 부정하고 헤치는 완고함에서 돌아서라. 마음에 품고 살아가길 바라던 사람, 이제 네가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으로 나서라.”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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