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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봉헌의 날이 갖는 함의[강신숙 수녀] 2월 2일(주님 봉헌 축일) 말라 3,1-4; 히브 2,14-18; 루카 2,22-40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교회는 이날을 특별히 “모든 봉헌자들(수도자를 포함한)의 날”로 기념하고 축하한다. 지금은 수도회마다 서원식을 제각각 다른 날로 정해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봉헌 축일이 오면 수도회들은 ‘서원 갱신식’을 갖고 서약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성당에서는 성전과 각 가정을 밝힐 수 있는 ‘초 축성’을 통해 자신을 태우며 빛이 되신 주님의 현존을 새롭게 돌아보는 예식을 갖는다. 여러모로 의미 있어 보인다.

그러나 봉헌 축일이 어떤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든 오늘 율법의 주인이신 주님이 모세의 율법에 순종해서 자신을 바쳤다는 사실은 일면 모두를 숙연하게 한다. 말라키는 이를 두고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고 예고한다. 그는 너희가 그토록 고대하고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이지만 실은 전혀 기대와는 다른 인물이 될 것이다.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2) 오늘 성전에 봉헌되는 그이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아서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이 하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는 자”(2-3)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누구도 예수의 귀환을 반길 것 같지 않다.

이스라엘의 봉헌축제는 이집트로부터의 대탈출을 감행한 원시 이스라엘의 오랜 체험을 기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파스카를 주도하던 주 하느님이 모세에게 일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1-2.11-13) 봉헌의 이유는 간단했다: “뒷날, 너희 아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14-16) 거친 광야를 헤쳐 나오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베푼 신의 자비와 성실함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을 중심에 두며 단단히 단결해서 죽음의 골짜기를 건넜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회고는 마침내 다다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있지 않았다. 회고는 “빈들에서 나눈 사랑”(호세 2,16-17)의 강렬함으로, 신앙의 원체험으로 돌아왔다. 

광야. ⓒ지금여기 자료사진

이후 공동체가 변절할 때마다, 위기적 상황이 닥칠 때마다 광야에서 맺은 신과의 약속을 환기시키는 이들이 생겨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이들, 경계 바깥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남은 사람들, 소위 ‘나지르인’이라 불린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성경에 출현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모세, 삼손, 사무엘, 엘리야, 세자 요한, 그리고 예수를 꼽을 수 있다. 또한 수많은 예언자가 이들의 정신을 추종하고 계승하며 역사를 이어 나갔다. 말라키아 역시 그 대열에 서 있다.

말라키 예언서는 짧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가 성전과 봉헌을 둘러싸고 짜여 있다: 한 사람이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들어와서 모든 것을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게’”(말라 3,1-4)하리라 예고한다. 예수가 성전으로 들어섰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새로운 힘이 성전과 세상을 덮쳤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전과 관련된 예수의 몇 가지 행동이 그런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하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한 발언이다. 그러나 눈여겨볼 다른 하나는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속에서 등장한다. 여인이 사마리아와 유다의 서로 다른 예배 장소를 두고 묻자 예수가 여자에게 답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중략)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4,21-22) 예수는 ‘고정된 공간’을 숭배하던 오랜 관습을 해체하고 움직이는 진리의 영을 새로운 성전으로 내세웠다. 영으로서의 성전은 소유할 수도, 소유될 수도 없다. 그러니 고정된 법도, 고정된 사제도 있을 리 없다. 신이 거하는 집을 짓고 사방에서 엎드려 예배하던 자들도 일순 황망해졌다. 영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불어가기’(요한 3,8)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넨 이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때(카이로스)를 가져오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여인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해방적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몇 시에 누구와 어떻게 보냈는지 셈할 필요가 없다. 하루, 한 달, 일 년이란 시간에 매달릴 이유는 더더욱 없다. 예수의 때는 달력에도 손목에 찬 시계 바늘의 숫자에도 있지 않다. 사마리아 여자가 과거의 사슬에서 풀려나던 때, 자신이 온전히 한 인격체로 회복되던 때, 스스로 떨쳐 일어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부끄럼 없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 때, 그때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 그리고 그 여자의 증언을 듣고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이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었다.”(28-39) 

이렇게 예수의 성전 입성은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해방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야곱의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은 맘몬의 그것이거나, 아무짝에 쓸모없는 돌무더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늘 시메온이 받아 안은 아기 예수의 봉헌은 “모든 민족들의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영광”(루카 2,27-32)이 된 사건이 되었다. 영과 진리로 해방을 일으키는 자의 봉헌, 오늘은 그를,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외 다른 뜻은 없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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