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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안다는 것’은 가히 우주적 사건이다[강신숙 수녀] 5월 12일(부활 제4주일) 사도 13,14.43-52; 묵시 7,9.14ㄴ-17; 요한 10,27-30

오늘 요한의 복음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요한 복음에서 “안다”는 동사는 다른 무엇보다 요한 복음서를 여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한다. 27절에 나타난 동사들 역시 ‘알다'(인식하다)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양상들(‘알아듣다, 알다, 따르다’)이다. 요한 복음은 장중한 서문의 중심을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었는데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도 못하였고, 맞아들이지도 않았다.”(요한 1,4-5.10-11)는 말로 채운다. 요한의 서문엔 빛과 어둠, 깊은 비애와 희망이 서로 교차한다. 그것은 분명 지척을 알 수 없는 어둠, 이 땅의 주인이 추방당했다는 비통함을 알리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오히려 고개를 들고 다가오는 신새벽을 단순하고 명료한 어조로 노래한다. 요한의 서문엔 환난 중에도 빛을 응시하는 자들의 위엄이 있으며, 요한의 공동체, 예수와 운명을 같이한 그들의 공동체가 보인다. 그들은 매질과 처벌, 박해와 죽음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꺾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어떤 비극적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들이 일촉즉발로 겪어 내야 했던 박해의 소용돌이를 감지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떻게 자기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던 걸까? 그럼에도 어떻게 그 혹독한 시간들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제자들은 예수 부활 이후에야 서서히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아보게 되었다. 정작 예수와 함께 지냈던 지난 삼년은 예수를 잃어버린 시간이다. 예수가 떠난 뒤, 정확히는 자신의 환상이 부서지고 난 뒤, 그래서 더는 그를 욕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부활이 지닌 가장 커다란 의미는 ‘눈이 열리고 실제를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부활은 그렇게 느닷없이, 예기치 않게, 재기조차 할 수 없는 폐허로 들이닥쳤다. 부활은 그 자체가 상식과 논리를 벗어난다. 제자들이, 초기교회가 박해와 죽음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요한은 이 모든 사실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지, 무지가 ‘실제’를 어떻게 왜곡하고, 어떤 비극으로 이끄는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부활’은 사실 인간의 모든 인식체계를 뒤흔든 초유의 사태였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 중 하나인 클레오파스는 자신들에게 다가온 낯선 이방인(예수)의 물음에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요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루카 24,18) 하고 볼멘소리로 답한다. 헤로데도, 로마 고위층들도, 유대인도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은 충격이었고 대혼돈이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도, 무덤으로 예수를 찾아온 막달레나 여자 마리아도, (….) 모두 ‘부활하신 예수’를 제때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성경은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의 상태를 ‘에크라툰타이'라는 말로 나타냈다. 여기서 ‘크라툰타이'는 ‘억류되어 있다’는 뜻인데, 이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 ‘에크라툰타이’다. 그러니까 무엇엔가 붙들려 있는 사람,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은 사물을 제대로 알아보거나 식별할 능력이 없는 자, 소경,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자란 소리다.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예수의 지적은 그래서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고집, 편견, 일천한 지식과 경험세계, 혹은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보기. (이미지 출처 = Pexels)

부활절 에피소드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막달레나 여자 마리아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그녀의 빈 무덤은 그녀 자신의 폐허고, ‘그녀의 예수’가 실종된 사건이며, 텅빈 공허고, 방황이다. 예수를 정원지기로 알아보던 마리아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고’ 예수를 붙들려고 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만지지 말라’며 거리를 둔다. 부활한 예수,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이해나 사고, 판단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바벨의 세계에서 익힌 지식이나 잣대로, 바벨의 언어나 인식체계로 더는 신을 ‘붙잡지 말라’는 것이다. 더는 당신들의 프레임을 ‘신의 뜻’으로 둔갑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욕망체계를 벗어난 신, 인간의 언어로 포획될 수 없는 신이다. 예수 부활은 바벨을 무너트리고 승리한 살아 있는 신의 통치다. 그래서 부활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요한은 부활의 묵시를 통해 예수가 지켜 내고자 했던 사람들, 아니 바벨의 장악에서 벗어난 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15) 예수의 궁극적 승리는 마침내 이들의 승리가 되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요한 10,28)이라 한 예수의 약속은 이렇게 지켜졌다.

예수는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엄청난 사건이게 하였다. 누군가를 알아 간다는 것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너’를 직면하는 것이고, 피해서 달아나고 싶은 상처난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며, 장벽으로 가로놓인 세상을 전진해 나가도록 등 떠다미는 것이다. 연일 폭주하는 비관적 소식으로 절망이, 의혹이 불같이 일어난다 해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너와 세계를 알아 간다는 것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될 수 없다. 무언가에 포로가 되었다 풀려난 사람은 더는 사사로운 개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너를 안다’는 것은 가히 우주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 ‘안다’는 것은 너(세계)를 깊이 사랑한다는 말이고, 너를 ‘너’이게 한다는 말이며, 너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말이다. 살면서 이보다 더 감동적인 일은 없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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