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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된 라자로[강신숙 수녀] 9월 29일(연중 제26주일) 아모 6,1ㄱㄴ.4-7; 1티모 6,11ㄱㄷ-16; 루카 16,19-31

나의 사견이긴 하나, ’존재‘를 사유한 시 중에 김춘수의 ’꽃‘만큼 탁월한 시는 없을 것 같다. 시인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그‘가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자신에게 다가와 꽃이 된 존재를 노래한다. 예수의 비유 중에 이례적으로 이름이 호명된 ’라자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사 가장 존재감 없는 자였다가 불리운 자 되었으니, 그간 자기 이름을 걸고 으스된 여타 존재들이 일순 무색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라자로는 죽어서 한 인격체요 개별자로 아브라함 품에 안겨 되살아나지만, 부자는 존재(이름)도 없는 무명씨로 전락해 고통받고 있다. 실제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자비와 공정이 누구를 살려내는지를 보여 주는 편파적(?)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 경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경고하는 비판적 메시지기도 하다.

이름의 명명이 중요한 것은 한 존재자가 그 이름을 통해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너‘로서 존재할 길은 누군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때만 가능하다. 신도 우주도 산 자도 죽은 자도 모두 마찬가지다. 가톨릭교회는 매 미사 때마다 ’너희는 이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해서 모든 기억이 ’꽃‘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기억은 힐링을, 어떤 기억은 파괴를 낳는다. 그럼에도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을 기억하게 할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족보에 기록되는 ’성씨‘이고 후손(DNA)이든, 저술작업이고 창작이든, 생은 본능적으로 삶을 지향하고 소멸을 거부하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기일을 기억하고, 익명의 연옥 영혼조차 잊지 않는 가톨릭의 풍습은 천상계를 망라해 가히 기억의 종교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러니 살아서든 죽어서든 단 한 번도 제대로 존재해 보지 못한 사람, 누구와 기억을 나눈 일이 없는 사람만큼 허망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라자로는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예수는 라자로가 어떤 생을 살고 갔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종기투성이로 꼼짝없이 누워서 누군가가 던져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으며, 개들까지 몰려와서 종기를 핥아 대는 무력감을 견뎌야 했다. 이런 라자로를 자본주의식으로 표현하자면 매우 무익하고 비생산적이며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시민들은 이런 라자로를 견딜 수 없으며, 하루속히 공공의 영역에서 치워지길 바란다. 우린 그러라고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니 적어도 저 ’소시오패스적 부자와는 다르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그들에겐 존엄한 인간 라자로가 보이지 않는다. 

그 끝을 첨예하게 보여 준 것이 ’부산형제복지원‘이고 ’대구희망원‘ 사건일 것이다. 아직도 비극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이 사건은 우리의 민낯과 위선을 고발하는 현장이 되었다. 형제복지원의 형제들이, 희망원의 희망들이 구타와 학대, 감금과 죽음으로 내몰리는 동안 우리 모두는 고상하고 품격 있는 시민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한 사람을 삭제해 나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아무 가책도 없이 악마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꽃'이 된 라자로.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가 이들 ’라자로‘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은 마치 마니피캇의 예언을 이루려는 듯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권세 있는 자들과 부유한 자들을 내치는”(루카 1,52-53) 행위였다. 무력한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붕괴된 이들의 존엄이 어떤 식으로 세워지는지를 보여 준다. 라자로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은 픽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임을 증거한다. 이스라엘에서 믿음은 본래 자신들의 정체를 잊지 않는 것이며, 모세오경과 예언서 전체는 이를 기억하게 하는 책이다. 그들은 자신이 ’라자로‘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 무력한 채 학대와 멸시를 견뎠던 자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쟁취한 해방의 과업은 곧 라자로들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과업인 것이다. 그 가엾은 이들이 이스라엘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과거를 망각했다. 그들은 ’라자로‘를 업신여기고 가혹하게 굴었다. 자신들의 가해자, 이집트가 하던 행실을 그대로 복습하고 반복해 나간 것이다. 이를 두고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낯뜨거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포도주를 퍼마시며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아모 6,1.4-7)

우린 너무 섣부르게 우리 식대로 라자로를 다루어서 자칫 ’상아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운 부자‘로 전락하곤 한다. 부자의 마지막 간청은 죽은 라자로를 다섯 형제에게로 보내 자신처럼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마저도 거부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루카 16,27-31)이다. 성경을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일순 서늘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수많은 라자로로 넘쳐난다. 안전을 비용으로 계산해서 죽음까지 외주화시킨 석탄화력발전소 희생자 고 김용균과 또 다른 김용균들, 삼성을 상대로 100일이 넘는 투쟁을 철탑 위에서 이어 가고 있는 김용희 씨와 또 다른 김용희 씨들, 눈에 띄지 않게 감춰진 수많은 ’형제원들‘, 우린 자칫 이들을 놓치기도 하고 놓칠 뻔하기도 한다. 지금 이들을 지켜 내는 연대적 동참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연대는 우리가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회적 기억이며, 마니피캇의 현장이고, 우리가 곧 당신이라는 선언이다. 그래야 그들이(우리가) 살 수 있다. 멀리서나마 모든 현장의 연대자들께 감사의 응원을 보낸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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