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7월 7일(연중 제14주일) 이사 66,10-14ㄷ; 갈라 6,14-18; 루카 10,1-12.17-20

예수의 일흔두 제자 파견은 언제 들어도 비장함이 묻어난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리 떼로 들어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예수는 왜 제자들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지니고 가지 못하게 했을까?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많이 준비해서 보내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가 한 말은 군더더기 없이 간단하고 단호하다. 덧댈 변명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현재 있는 그대로 떠나라는 것, 앞일을 대비하지 말라는 것, 지인들과의 관계로 발목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 누군가에게 신세 지는 일조차 받은 소명과 부합되지 않으면 지체치 말고 떠나라는 것, 다시 말해서 사명 수행에 온몸을 던지라는 것이다. 이 외에 다른 어떤 해석이 필요할까? 여기서 논점은 ”수확할 밭“이고 그 밭의 ”일꾼“이다. 목적이 수단과 뒤바뀔 것에 대한 스승의 염려가 분명하다.

예수의 이 말씀에 철저를 기하기 위해 복음적 청빈 서약을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스승의 이러한 뜻을 따르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들은 세세한 규정과 법을 세워서 ‘가난’에 흠 잡힐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자신이 얼마나 청빈한지에 대해서, 두 켤레의 구두와 짐 가방에 대해서, 집에 홀로 남은 노부모님에 대해서 허용 범주를 찾느라 고군분투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지켜야 할 청빈 자체가 ‘소명’이 되었다. 그러다가 위험하다는 이리 떼는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 실제 자신들이 떠나야 할 길이 어딘지, 자신이 무엇하는 사람인지조차 헷갈리게 되었다. ‘하지 말라’는 것에 매달린 이들은 ‘하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가난’을 지키고, 수확해야 할 밭은 버려진 채 여전히 거기서 멈춰 서 있는 것이다. 여전히 일꾼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일꾼은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수확할 밭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되자마자 난민들의 첫 정박지인 람페두사를 찾았다. 이후 공식적 문헌으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국제수도회 최고장상들의 모임과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 국가와 국가, 종교와 종교 간을 이으면서 그는 언제 누구와 인터뷰를 하든, 어떤 강론을 하든 한결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교회는 ‘야전병원’이어야 하고, 교회는 이제 그만 거리로 나가서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해야 하며, 더럽혀지는 일을 마다하지 말고 나가라는 거였다. 그의 재촉은 오늘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던진 첫 번째 외마디, ”가거라“(루카 10,3)와도 겹친다. 교황의 긴박한 촉구는 예수의 긴박성과 맞물려 있다. 예수의 긴박성은 예수의 뒤를 따르길 원한 세 부류의 제자들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기 위해 ‘부모의 장례도, 작별인사’도 허락하지 않았다.(루카 9,57-62) 

프란치스코 교황. (이미지 출처 = Flickr)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의 시선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위기 상황에 꽂혀 있었다. 교황의 시선 역시 그러하다. 세계가 처한 끔찍한 테러와 전쟁에, 난민과 굶주림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기후변화에 멈춰 서 있다. 그는 세계와 교회가 이런 사명에 나서 주길 간절히 호소해 왔다. 이제는 그런 그가 우릴 불편하게 한다. 그는 이전보다 부쩍 노쇠해진 몸으로 꼼짝 않는 교회를 어찌하지 못한 채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런 그를 맥없이 지켜봐야 하는 우리가 서글프다. ”복음의 기쁨“에 환호하고 교황의 방문에 감격해 하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교황이 가진 개혁의 그림은 당선 이후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물며 고립된 교회가 될 것이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며 “잘못될 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거짓된 안정감을 심어 주는 구조”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 교회를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부자 나라의 중심에 가서는 서슴없이 ‘배제의 경제, 돈의 맹목성, 금융체제의 지배, 폭력을 부르는 불평등’을 ‘도전 과제’로 설파하기도 했다. 그는 교회가 왜 야전병원이 될 수 없는지, 경직된 조직이 되었는지, 무엇이 교회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부동의 관료주의는 결국 부패하리라는 것을, 그 폐해의 핵심에 돈과 권력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선 교황청 중심부부터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힘든 개혁의 첫 번째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것이다. 세계는 이 놀라운 소식에 반신반의하며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해묵은 수구의 뿌리가 이대로 조용히 뽑혀질 리 없다. 이미 여기저기서 반격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지 않은가.

관료주의의 개혁은 왜 그토록 어려운 걸까? 관료주의를 사전적으로 살펴보면 ‘상하관계의 행정 시스템이며 엄격하고 비인격적 규칙에 따라 많은 양의 업무를 처리하도록 설계된 체제’라고 나와 있다. 관료체제가 갖는 안정과 효율적 방식 때문에 국가나 사회, 기업, 학교, 종교 등 사회 전반은 이 시스템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한 번 포맷된 체제는 철저한 상명하복과 규칙, 관행으로 운영되어서 개인이(부하가, 혹은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이런 조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해 오던 것을 깨는’ 무질서다. 창의성이나 기동성, 다양성, 개방성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주장하는 이들, 조직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당장 조직의 부적응자로 ‘찍히고’ 만다. 그러니 조직에서 잘 생존하기 위해서는 복종과 침묵만이 답이며, 세상에 대한 긴박한 요청 따위는 서류더미 속에나 묻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를 움직이는 체제의 수호자들이 충성 맹세를 하는 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견고한 조직문화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창의적 열정을 불어넣는 이들이라 하는 데도 말이다. 교회의 발목을 잡는 것, 포기할 수 없는 ‘보따리’가 안타깝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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