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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돌아오는 교회가 되길[강신숙 수녀] 10월 13일(연중 제28주일) 2열왕 5,14-17; 2티모 2,8-13; 루카 17,11-19

칼 라너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한 교회 비판은 물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역으로,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이론화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사회적 책임에 수세적으로 일관했던 교회가 이후 좀 더 진일보한 전향적 태도를 갖추게 된 것도, 교회의 편협한 구원관을 세상 밖으로 옮기는 데 틈새를 벌려 놓은 것도 그의 공로를 배제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가 제기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천년 주장이었던 ‘오직 교회 안에서만의 구원’을 달리 생각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베푼 이 관대한 처사가 몹시 거슬렸다. 그들은 ‘익명의 불교도인’, ‘익명의 이슬람인’이란 말로 자신들을 ‘익명’ 처리한 가톨릭의 자기중심적 구원관을 비꼬았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지금 생각하면 좀 민망한 면도 있지만 당시 강고한 교회의 담벼락을 허무는 데 이보다 더 멋진 말은 없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등장하는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나 예수에게로 돌아온 이방인 나환자는 모두 이스라엘 바깥의 사람들이며 나환자(비구원 상태)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나아만이란 인물은 이스라엘을 위협할 만큼 엄청난 세력가였고 또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환대는커녕 내다보지도 않은 채 종을 시켜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하게 한다. 그러면 완벽히 치유되리라는 것이다. 나아만이 이런 푸대접을 받고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당연히 그(엘리사)가 나에게 와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리라” 기대했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은가?”(2열왕 5,9-12) 

그렇다. 누가 봐도 설득력 있는 분노다. 그러나 이랬던 나아만이 결국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어린아이처럼 새살이 돋는’ 치유를 얻었다.(14)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엘리사에게 이스라엘의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한다. 그러던 그가 본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엘리사를 만나서 한 가지 예외적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시리아로 돌아가면 주군을 부축하고 림몬 신전에 올라 예배를 해야 하는데 이런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규정대로라면 절대 안 된다 할 줄 알았던 엘리사가 의외의 답변을 했다: “안심하고 가십시오.”(19)

가톨릭 교회. (이미지 출처 = Pixnio)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담보된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은 그들에게 독이 되었다. 살아 있는 역사의 신을 관념적 신, 무비판적 독단주의, 고착된 율법주의의 신으로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의 패착은 자신을 통찰하고 넘어서는 데 게을렀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무한 반복의 예식과 교의에 취해 살아 계신 해방자요 창조주인 신을 자기들의 법으로 결박해 버렸다. 매번 분향을 올릴 때마다 신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럴 때마다 신이 그런 행위를 역겨워 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림몬 신전 예배를 문제 삼지 않았다. 구원은 이스라엘 신전이든 림몬 신전이든, ‘신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엘리사의 요르단 강과 예수의 안수는 구원이 교조주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준다. 한 인간의 구원문제는 종족, 지위 고하, 전통 신의 유무, 성직 제도(제사장의 승인 여부),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치유받아야 할 ‘한 사람’, 그가 전부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존엄하며, 동시에 자비의 대상이다. 제 스스로 치유 받을 기회를 걷어찬 것은 종교를 가장한 오만이다.

가톨릭은 구원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엘리사나 예수의 행위를 반추해 보면 교회의 구원 시스템이 실제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 구원의 전제 조건이 이스라엘의 율법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단호히 거절한 일은 구원성사에 어떤 대가도 따라서는 안 되며, 재산을 축적하는 일로 전락해서도 안 됨을 역설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거절한 나아만의 예물을 가로채고 온갖 거짓말로 자기 탐욕을 변명하던 종 게하지의 몰락을 이렇게 꾸짖었다: “지금이 돈을 받아 옷과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 양과 소, 남종과 여종을 사들일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너에게 옮아 네 후손들에게 영원히 붙어 다닐 것이다.”(2열왕 5,26-27) 나아만의 치유는 요르단 강을 선택해서 들어간 그와 하느님 간의 전적인 무상적 관계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 여기에 어떤 명분도 탐욕도 끼어들어선 안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주 오랜 동안 교회는 뭔가를 바칠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이 제물이든 재능이든 자신의 아우라든 그런 것을 두르고 힘을 주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교도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본당을 찾아 얼굴을 내밀기란 너무 어려운 구조다. 입문예식을 거쳐야 겨우 문이 열리고, 그 문을 열고 들어온들 낯선 타인이긴 마찬가지다. 이것은 신자(쉬는 신자) 수의 통계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자기 프레임에 갇혀서 실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은 지가 너무 오래여서 그렇다. 교회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오랜 신조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간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우린 빗장의 주인이고 나머진 외부자일 뿐이다. 이러다가 제사장에게로 떠난 아홉 명의 나환자들로 가득 찬 그들만의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예수가 감탄했던 한 사람의 이방인 나환자, 그들이 돌아오는 교회를 꿈꾼다. 교회가 담벼락을 허물고 그들로 채워지는 광장이 되길, 이 광장에서 해방을 모의하고 작당하는 그날이 오길, 고대하고 또 고대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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