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신학과 영성 지금여기 강론대 강신숙 수녀 강론
위선[강신숙 수녀] 10월 27일(연중 제30주일) 집회 35,15ㄴ-17,20-22ㄴ; 2티모 4,6-8.16-18; 루카 18,9-14

프로이트는 인간의 위선이 자신의 본래적 욕구와 충동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없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인식한다. 욕구와 충동은 그 자체로 선악과 무관한데도 사회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비난부터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도덕적 강도는 높아지고 이에 부응할 수 없는 사람들은 위신과 체면으로 도피한다.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모형의 틈새에 끼어서 온전히 자신이지도 못한 채, 자신일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불안(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 역시 설정된 모조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도덕적이라고 믿는 고도의 인간 문명이 한순간에 세계를 폐허로 무너트리는 괴력으로 화한다는 데 있다. 인간에 대해 깊은 환멸을 느껴 본 사람들은 도덕이니 소양이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황망하고 몰염치한 것인지를 안다. 결국 원본을 떠난 세계는 ‘코헬렛’의 저자가 말한 대로 허무하고, 덧없는 세계인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처음부터 솔직했다. 창세기 저자들은 개인과 가족, 공동체와 사회가 유혹과 탐욕에 노출된 존재, 깨지기 쉬운 세계임을 직시한다.(창세 3-11장) 부인할 수 없는 건 거짓과 위선에 가장 취약한 계층이 사회 지도층이나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점이다.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들은 그만큼 자기 자신이기가 어렵다. 인간의 본래적 모습에서 출발하지 않는 성장은 위선이든 위악이든 제 실체를 숨기기 마련이고, 거짓 인간의 탄생은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다.

예수는 종교인들의 위선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단호했다. 그런 배경에는 이들이 일반 대중에게 끼치는 공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이 언급하고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도 그중 한 사례다. 예수는 일찌감치 이 두 부류의 태도에 주목했다. 누군가를 업신여길 수 ‘있는’ 부류들과 누구도 업신여길 수 ‘없는’ 부류들이 그러했다. 보통의 다수는 농도만 다를 뿐 이 양극단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들이 이런 식으로 신분이 고착된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는 이 고착된 설정을 아주 단순하게 거침없이 허물었다. 이것이 그가 선포한 ‘하느님나라’의 실체다. 위선은 당연히 하느님나라를 방해하고 가로막는 자들이 부리는 거짓 위세이므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도.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런데 예수를 참을 수 없긴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눈에 비친 예수의 모든 행위는 위험천만한 도발이었다. 예수의 거칠 것 없는 행동과 대중들의 환호가 바리사이들의 비위를 건드린 건 당연했다. 바리사이는 그 어원에서도 드러나듯이 일반 대중들과는 확연히 ‘분리된 자’들이었다. 무수한 계율 준수를 통해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은 율법과 전통 준수에서 철저한 신념과 태도로 살아갔다. 이들이 유대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원조라고 추정되는 하시딤(BC 2세기)에서 유래한다. 하시딤(경건한 자) 공동체는 헬레니즘의 혼합문화와 시리아의 조직적 박해 속에서도 율법을 지켜 낸 영웅들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유대 사회 안에서 갖는 도덕적 명분과 자부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으로부터의 인기와 신망도 두터워서 유대 최고법정이나 의회(산헤드린)도 이들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바리사이즘이 곧 유다이즘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수가 왜 바리사이들과 빈번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리사이들 눈에 예수는 출신이 불명확한 미심쩍은 자에 불과했다. 이런 자가 어느 날 대중의 인기를 구가하고 수 세기 동안 쌓아 올린 자신들의 전통과 명성을 간단히 먹칠하는 일이 벌어졌다. 더욱이 ‘선생’이라 불리는 자가 경건한 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 세리나 죄인, 창녀들과 함께 어울리며, 안식일을 가리지 않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었으니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세리들은 압제자 로마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서 동족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자들이 아닌가. 직업상 안식일을 지킬 수도 없었고, 이방인들과 경계를 두지도 않았으며, 로마를 위해 부역하는 반역자요 변절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을 받아들이고 제자로 삼기까지 했으니 예수의 스캔들은 당연했다. 왜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예수의 행동 일체를 감시하고 딴죽을 걸었는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예수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을 비판한 것은 이들의 겉치레와 형식주의가 율법 본래의 정신을 훼손시켰기 때문이다. 율법과 전통을 권력화해서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을 무시하고 테러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누구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기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바닥으로 내려앉아 본 사람만 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에 대한 이 같은 판단은 파격적이고 놀라운 일이었겠지만 하느님의 연민은 본시 이런 자들의 것이었다. 예수는 도처에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경계했다. 가령,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 기도를 하려거든 골방에서 할 것,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 것, 열심한 체하지 말 것, 등등은 바리사이들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위선과 거짓은 늘 한패로 붙어 다닌다. 예수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세리인 척할 필요도 없고, 바리사이가 아닌 척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