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9월 1일(연중 제22주일) 집회 3,17-18.20.28-29; 히브 12,18-19.22-24ㄱ; 루카 14,1.7-14

상류층 세계의 잘나가던 젊은이, 샤를 드 푸코를 결정적으로 무너트린 말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었던 예수의 마지막 자리”였다. 모든 것이 잘 보장되어 있던 젊은 귀족 청년의 미래가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이후 예수를 닮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푸코가 걸어 들어간 종착지는 사하라 사막의 ‘뚜아레그 부족’이 되었다. 거기서 그는 중심의 세계를 벗어난 영원한 아웃사이더,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 생을 마쳤다.

예수가 초대받은 이에게 던진 ‘마지막 자리’는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자”,(루카 14,11) 자기 인식에서 자유로운 자가 차지하는 자리다. 그런 자만이 ‘높낮이’에 상관없이 쿨하게 행동할 수 있다. 예수는 환상이 제거된 유일한 ‘한 자리’를 아는 자가 초대할 능력이 있는 자, 누구를, 어떻게 초대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라 말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14,12-14)

그러나 높은 자리에 앉지 않겠다는 결심은 말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한 사회의 중심 토대가 구조, 시스템, 규범, 정책, 이데올로기의 전체적 패러다임과 엮여 있기 때문이다. 지배담론의 내부에서 지식을 획득한 사람은 자신이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서 배제된 자들의 세계가 어떠한지 가늠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중심에 서는 훈련을 받으며 성장한다. 중심에 서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게’ 된 그들은 일류(서울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진입을 위해 목숨을 건다. ‘왜’라는 물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답을 알 필요도 없다. 이미 프로그래밍화 된 아이들에게 질문이란 가당치 않다. 우리 사회 안에서 이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함께 공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떤 사회, 어떤 공동체를 만들까?

사실 소외의 첫 번째 대상은 말째들이 아니다. 중심을 탈환하려는 자들, 타자를 제거해야만 살 수 있는 자들, 소외시키면서 소외당하는 그들 자신이다. 모순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이치다. 이렇게 그어진 선에서 평생 폐쇄회로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딱 두 부류(상류와 하류)의 세계만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 최상위 클래스가 인생의 목표인 자들이 실상은 ‘나머지’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신의 이치는 인간의 셈법과 달라서 이처럼 황망하기 짝이 없는 결과를 낳는다. 나는 가끔씩, 오지랖인지 모르겠으나, 함께 어울려 살기를 포기한 그들 안부가 궁금해진다. 진정 97퍼센트와 갈라져서 섬처럼 떠 있는 것이, 그렇게 요트 위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면 행복한지 묻고 싶은 것이다. 알고 보면 한 사회의 ‘중심 토대’라는 것이 이렇게 허접하고 별 볼 일 없다. ‘소외’는 높낮이를 떠나서 일어나서도, 일어나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97퍼센트와 갈라져서 떠 있는 것이 행복한가. (이미지 출처 = Pxhere)

오늘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런 세계를 몇 개의 이미지로 나누어서 보여 준다. 시온의 도성을 차지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히브 12,18-19) 히브리서에서 묘사된 짙은 어둠에 처한 이들은 예수가 차지한 마지막 자리에 세워진 하느님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곳은 그들이 평생 외면하고 수치스럽게 여긴 자리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천상 예루살렘이 나타내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 하늘에 등록된 자들의 모임, 의인들의 영,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와 같은 말로 이어진다.(22-24) 이들은 모두 중심(첫째 자리)에서 벗어난 이들, 모두가 외면한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 입성하는 세계다.

중심은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진다. 예수의 논리로 보자면 중심은 ’초대한 이‘(루카 14,9)가 정한다. 그러니 함부로 상석을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 자리‘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이다.(10) 이것 외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권은 없다. 그 자리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 자리로 내려와 봐야 자신이 숭배해 온 세계가 보이는 때문이다.

예수는 초대받은 모든 이에게 ’초대‘의 의미를 재규정한다. 자기 유익에 따라 사람을 초대하지 말라는 것, 초대는 아무것도 보상받을 수 없는 자들에게 하라는 것이다. 복음적 반전은 이때 일어난다.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그들이 너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혁명은 자신이 숭배해 온 것(자신이든 사회든)을 비판적 문제 제기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래야 우리를 지배하는 자본과 환경파괴, 경쟁 중심의 세계, 장애인과 노인, 기아와 질병의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방식, 새로운 대안, 새로운 세계건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세계의 변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