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0월 28일(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오늘 마르코 복음서는 표면상으로 매우 단순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생동감 있고, 부드러우며, 의미가 깊은 이야기를 전해 준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베드로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면서(마르 8장) 주님은 그분이 큰 고난을 겪고 백성의 지도자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 일은 종교권력의 중심지이며, 경제정치권력의 중심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이다. 주님은 결정적 대립이 일어나게 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

그들이 역사적 도시 예리코를 떠나고 있을 때, 두 가지 이유로 가난한 사람, 눈먼 걸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다. 마르코는 당대 사람들의 눈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마르 10,46)다. 후에 이 사람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 의해 형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걸인 바르티매오는 갈릴래아 사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영대한다.(10,47) 이렇게 행동하면서 그 가난한 사람은 후에 예루살렘 주민들이 메시아에게 보냈던 열광적 환영을 예고한다.(11,10) 그의 이 환영은 예수님의 체포와 처형을 가져오는 이유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앞 못 보는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일은 사회의 보잘것없는 사람들, 길가에 앉아 있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바르티매오 같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가기 위하여 벌떡 뛰어오르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어떻게 경청하는가를 배우기

걸인은 계속 외쳐 대고,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히브 5,1) 인간의 요구에 깨어 있는 존재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주님은 걸인을 위해 시간을 낸다. 주님은 그분의 뜻을 성급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은 듣고 싶어 하고, 그래서 걸인에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독재적인 질서들을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하여(예레 31,9) 오셨다.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은 단지 우리의 관대함이나 도움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 애덕의 대상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구와 권리를 가진 주체들이다.

오늘날 세계의 가난한 이들의 긴급한 비극적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이 더 좋은지 그들 자신보다 우리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쉽사리 빠지기 쉽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또한 다른 이들을 돕는 것도 일종의 관계인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는 그들의 필요에 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눈먼 사람은 자선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는 건강과 생명을 청하고 있다. 그는 신뢰심을 갖고 요청을 신속하게 표현한다: “그는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마르 10,50) 그의 요청은 예수님을 부를 때 “나의 스승님”(10,51)이라고 하는 것처럼, 애정을 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의 시력을 회복시키고, 그가 구원받았다고 선포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믿음이, 예수님께 대한 그의 신뢰심이 그에게 생명을 주었고, 그를 낫게 했다고 말한다.(10,52) 바르티매오는 새로운 제자가 되었고, 더 이상 길가에 앉아 있지 않으며, 결국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길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바르티매오 같은 수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길가에 앉아 있지 않고 주님께로 가기 위하여, 생명의 친구이신 분께로 가기 위하여 벌떡 뛰어오르고 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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