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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슴에 새기기[구티에레스 신부] 11월 4일(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믿는 이들의 기억은 아무도 잊지 않는 하느님의 기억과 유사하다.

하느님 홀로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성경의 하느님이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마르 12,27)이라고 선언한다. 한 율법학자가(의심할 여지없이 바리사이다) 학자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질문을 던진다: “어떤 계명이 가장 첫째가는 계명입니까?”(마르 12,28) 항상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대답은 도전적이다. 중요한 계명은 단지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계명에 전제되는(오직 마르코 복음만 그렇고, 마태오나 루카 복음서는 그렇지 않다) 선언이 있는데, 이 선언은 모든 것의 시초로 드러난다: “주님이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신명 6,4; 마르 12,29)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 사랑은 바로 이 원칙에서 나오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즉 공통의 원천을 지닌 까닭에 이 두 가지 사랑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성서적 신앙(예수님이 그분의 근거를 두고 있는 전통인데)은 하느님이 우리 삶의 절대이며, 유일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느님은 어떤 추상적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마르 12,30)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온갖 형태의 우상숭배를 조목조목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상숭배란 우리의 신뢰를 하느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신도들에게 위험한 일이다.

얼마 전에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 서거 400주년을 기념했다. 신비가이며, 시인이었던 그의 역사적 배경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그는 수많은 사람이 가난과 불의로 신음하는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들의 상황과 수많은 문제에 대하여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 자신의 현실이라는 맥락 속에서 우리가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할 보편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단지 하느님이라는 메시지다, 아무 것도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서는 안 된다. 권력과 돈은 성경에서 고발하는 우상들이다. 우리들의 정의에 대한 투신, 사회분석, 혹은 우리들의 신학과제들도 그것들이 절대로 중단하지 말아야 할 여정, 즉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의 여정을 중단하도록 부추길 때에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모두 우상이 될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상황과 그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의 하느님이신 주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사랑 (이미지 출처 = Pixabay)

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느님의 현존이 너무나 고유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의 이웃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똑같은 원칙으로부터 솟아난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했던 다른 계명이다. 그것은 어떤 첨가사항도 아니며, 선택사항도 아니다. 이 사랑의 뿌리도 역시 한 분이신 하느님, 모든 이를 사랑하는 하느님, 모든 사람을 기억하는 하느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신명 6,6)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표현된다.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루카 19,18; 마르 12,31)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족처럼, 식솔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그네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치 그들을 우리 가족의 일원처럼 여기고, 그와 똑같이 열정적으로 연대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는 이 사실을 이해한다. 그는 이 사실이 예배에 의미를 주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예배는 헛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알아차린다. 주님은 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한다.(마르 12,34) 그러나 아무리 의견이 옳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의견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 율법학자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올바르게 말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임을 모든 상황이 잘 말해 주고 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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