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1월 18일(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32

연중시기가 끝나 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다.

성전의 종말인가, 역사의 종말인가?

이번 주일 복음 구절은 마르코 복음서의 가장 어려운 장에서 뽑은 부분이다. 이 구절은 자주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을 전체로 보게 되면, 연대기보다 어떤 의미의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감탄할 때, 예수님은 그 성전의 몰락을 예고한다.(마르 13,1-2) 그러자 그분의 추종자들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며, 그 징조는 무엇인가를 묻는다.(13,4) 마르코 복음서 13장 전체에는 예수님의 선언과 그 질문이 짙게 자리 잡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분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또한 갈등과 대립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13,14-22) 제자들은 미리 경고를 받아야 한다.(13,23) 여기에서 성전은 당대의 특권층 사람들, 하느님나라의 선포를 거부한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고 그분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권능과 위엄을 갖고 오실 것이다.(13,24-27) 그분의 메시지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성전의 유혹은 영속적인 것이다. 유혹은 역사의 한 시대나 유대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자들, 예수님 당대와 우리 같은 그 이후의 제자들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나라의 첫 번째 열매, 교회를 부유하고 권력이 넘치는 성전으로 변질시킬 수 있다.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부당한 특권을 지지하는 건물로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고 계시고, 이런 종류의 종교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계속 오고 계신다. 그분의 메시지는 해방의 메시지다. 우리로 하여금 지배하기보다 섬기라고 요구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 조금 앞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한다.(10,45) 성전은 이 말씀과 정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성전의 몰락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 성전의 파괴는 하느님나라의 빛으로 보아야 할 사건이며, 주님의 재림의 관점으로부터 판단해야 할 사건이다.

지금의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이미지 출처 = Pixabay)

시대의 징조를 읽기

우리는 오로지 매일매일 사건들을 분석함으로써만 시대의 징조들을 읽을 수 있다.(마르 13,28-32)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주님의 말씀이 그것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며, 그 역사 속에서 주님이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영감을 얻게 된다. 만일 우리들이 복음을 탐욕스럽게, 그리고 무균적으로 활기 없게 유지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감추어 두고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꽁꽁 싸 둔 곳에서 시대의 징표를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특권과 자만심의 “성전”으로 만들려는 충동과 유혹을 떨쳐 버린다면, 구원을 환영하고 주님의 우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것이다.(다니 12,1)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들을 지구의 먼지로부터 들어올릴 것이다.(12,2) 깨어 있음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 하느님나라의 성장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바치게 될 것이다.(히브 10장)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