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일상과 신비’에 스물 일곱 번째 글을 올립니다. 이번 회가 이 공간에서 여러분께 글을 띄우는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생각과 언어를 가다듬는 쉼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제 글에 보여 주신 가르침과 격려와 공감에 감사드립니다.

실은 ‘일상과 신비’ 뿐 아니라, 제 삶 자체에 잠시 쉼표를 찍으려고 합니다. 가르치던 학교에 휴직계를 냈어요. 대학 강단에서 신학을 강의하던 지난 4년은 제게 참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선택과 실험 끝에 주어진 결실이자 행운이었지요. 하지만 “안전한” 궤도에 들어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상에 익숙해지자, 어느덧 초심을 잃고 글과 말을 부려 저 자신이 살아갈 보루를 확보하는 데 우선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고, 관성이 저를 끌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더 늦기 전에 발길을 멈추고 이제껏 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고도 없고 말도 물도 설은 타향에 도착해 이방인으로 살아온 지 십오 년이 되는 해입니다. 십오 년의 세월은 떠나온 고향마저 타향으로 만들어 버리는 가뭇없는 시간이지요. 고향은 거기 그대로 있지만, 늘 돌아가고 싶은 그 시간 속의 고향, 뜨겁던 순간들은 거기에 없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리움만 남긴 채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지요. 디딜 땅이 없다는 황망함은 지구의 이편과 저편을 떠돌며 살아온 제게는 물리적으로 체감되는 일이지만, 사실 지리적 이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을 떠돌며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느끼는 감정일지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을 방해하는 것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세상엔 이방인도 늘어나게 마련이고요.

이방인의 삶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외로움,” 혹은 “고독”이 아니라 “고립”입니다. 낭만적인 감상으로 포장되지 않는 건조하고 거칠고 위험한 상태, 육체적, 정치적, 실존적으로 다른 이들과 소통이 배제된 상태가 고립이지요. 이방인은 고립에 빠지기 쉬울 뿐 아니라, 고립에 스스로를 묶어 두기도 쉽습니다. 이방인으로 살아 온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내가 그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느껴지는 한기에 내성을 키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요. 그 싸늘함을 반복적으로 견디다 지치면, 스스로 “나는 다른 사람”임을 자처하며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고립을 택하게 됩니다. 이해와 공감을 받을 가능성을 그만 포기해 버리는 것이죠.

문제는 고립이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만큼 오래 누적되는 상황입니다. 사람은 관계적인 동물이죠. 스스로의 연약함을 드러내며 부딪히고 깨어지고 어루고 일으켜가는 관계, 자신을 내어 주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관계 속에서만 사람은 사람다워질 수 있습니다. 고립이 지속되면 연약함을 드러내는 일이 두렵고 귀찮고 버거워지면서 관계 맺을 기회를 자꾸 피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지요.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위해 마련된 마음의 빈자리를 대신 메꾸는 것은 비대해진 자아입니다. 고립된 자아는 방어본능을 극대화하죠. 연약함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당화하는 일이 거듭되면, 나보다 연약한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이 점점 떨어집니다. 그들의 상처를 통해 내 상처가 상기되는 것이 싫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내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은 점차 인간의 얼굴을 잃고 괴물의 형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요즈음 너무나 많은 괴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을 지키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요.

스승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한참 멀어진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상황을 부추깁니다. 안과 밖을 가르는 성곽을 쌓고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오히려 방해하죠. 사람의 희노애락을 가상체험하는 극장으로 전락하여 정작 성곽 밖의 이웃들이 겪는 고통에는 무감각해지도록 훈련합니다. 결코 뜨겁지도 절절하지도 않은 삶을 영위하면서도 얼마든지 뜨겁고 절절한 척 착각하거나 혹은 포장한 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방인들을 보듬어 이웃이 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이웃 사이를 내 편과 저편으로 나누어 오히려 이방인을 늘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제 자신 속에 이런 괴물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만 것입니다. 고립에 스스로를 가두고, 저 자신의 변화는 거부하며, 이웃의 고통에는 안전 거리를 확보한 채 말과 글로만 울고 웃는 신학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요.

돌아보건대 삶이 제게 허락한 가장 큰 축복은 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끌어안았던 순간들인 듯싶습니다. 어눌하고 비겁하고 비루한 모습이 제 것임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럼에도 사랑하고 사랑 받을 권리가 있다고 다독이며 일으켜 세우는 그 순간들은 분명 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들은 저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축복을 거부하고, 다른 이들이 제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로 막으며, 안전한 삶의 공간에 머물러 세상을 관조하듯 살아가고 싶은 부끄러운 저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멈추어야겠다 – 그런 절박함에서 내린 결정이 “쉼”입니다. 그래서 익숙했던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려 합니다. 당분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만남과 부딪힘을 통해 저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순례의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 “쉼”이 신학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제게 어떤 의미가 될지 아직 모릅니다. 다만 마음 깊은 곳에서 지금 멈추라 하고, 나아가기 전에 돌아보라 하기에 그 부름에 따릅니다.

새로운 여정을 떠나기 앞서 지난 8월, 혼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신들이 태어난 곳,” 테오티우아칸이라 이름 붙여진, 멕시코시티에서 동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고대 도시로요. 지금은 유적만 남아 있는 이 도시는 스페인이 미대륙을 침범하기 전, 대륙에 존재했던 많은 도시들 중 가장 번성했던 곳이라고 하지요. 인구 10만, 같은 시기 전 세계 모든 도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졌을 만큼 찬란한 문명을 일구었던 이 곳의 주민들은 7세기경 자신들의 삶터를 버리고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 '죽은 자의 길'. ⓒ조민아

이 고대 도시에는 “죽은 자의 거리”라 불리는 길이 있습니다. 인신 공양의 풍습이 남아 있던 고대, 사람의 심장을 신에게 바치는 신전이었다고 전해지는, 이름하여 “달의 피라미드”로 이어지는 2.5킬로미터 정도의 평평한 길이지요.(고고학자들이 최근 다른 가설을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죽은 자의 거리”는 말 그대로 죽음을 운명으로 받은 이들이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걸었던 길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의 번영을 위해 신께 제사를 올리는 날이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생명력이 있는 건강한 육체를 가진 젊은이 몇몇이 제물이 되기 위해 이 길을 걸어야 했답니다. 주로 부족 사이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어 잡혀 온 전사들이 선택 대상이 되었다고 하지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아니 교차와 분절을 수없이 반복하는 길. 그 길을 걸었습니다. 죽어 간 전사들이 서 있었을 길의 목전에 멈춰 서서 생각했습니다. 수백 년 전 오늘, 찰나의 호명으로 그들의 삶과 죽음이 갈리었을 터이지요. 삶으로 호명된 전사는 내일 끝날지 아니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삶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고, 죽음으로 호명된 전사는 이 길이 끝나지 않길 바라며, 혹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죽은 자의 거리”를 걸었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이쪽과 저쪽 모두에 그저 희미할 뿐이되, 삶을 삶 답게 하는 것은 어쩌면 길 밖의 사람들 뿐이었을지 모릅니다. 산 자들의 길은 그들을 기다릴 사람으로 이어지고, 죽는 자들의 길은 혼자 걷는 외길로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한 곳은 “죽은 자의 거리”만은 아니겠지요. 우리는 매일 매일, “죽은 자의 거리”에 섭니다. 수백 년 전 전사들처럼, 우리들 앞에도 삶으로 이어지는 길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전사들보다 조금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우리의 운명은 그저 호명으로 결정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스스로를 살리고 죽일 능력은 없지만, 우리의 이웃을 살리고 죽일 능력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내미는 손길에 살림이 있고, 거두는 손길에 죽음이 있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품고 기다려 줄 때, 그이와 우리의 길은 같이 걸어갈 삶의 길이 되고, 홀로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하고 앞만 바라보고 걸어갈 때, 그이와 우리의 길은 “죽은 자의 거리”가 되겠지요.

이렇게 “죽은 자의 거리”를 삶으로 이끄는 것이 신비입니다. 스스로를 부수어 생명의 떡이 되어 우리를 먹이시는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 준 그 삶의 신비입니다.

스승 예수가 그랬듯, 삶과 살림으로, 사람들 속으로 걸어갑니다. 그 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조민아의 일상과 신비'를 맡아 주신 조민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 편집자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쳤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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