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공교롭게도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불과 20여 분 떨어진 곳에 요 며칠 전 세계인의 공분을 사게 된 그 남자, 치과 의사이자 짐바브웨의 명물 사자 ‘세실’을 죽인 밀렵꾼 월터 파머의 병원이 있습니다.

마침 부근을 지날 일이 있어 잠깐 들러 보았는데, 제가 도착한 시간에 시위는 없었지만 굳게 닫힌 병원 앞에 그를 비난하는 피켓들이 세워져 있고 기자들이 새벽부터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태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미네소타의 “평범한” 치과의사 월터 파머는 야생동물 사냥이라는 그의 오래된 “취미생활”을 위해 짐바브웨로 여행을 떠납니다. 거기서 그는 “사자사냥이 야생 동물 사냥의 백미이니 그냥 돌아가면 큰 후회를 할 것”이라 말하는 지역 가이드들에게 사냥을 도와 주는 대가로 5만 5000달러를 줬다는군요.

그는 일행과 함께 수사자 한 마리에게 석궁을 쏘아 국립공원 밖 “사냥허가 구역”으로 유도해 냈다고 합니다. 일행이 쏜 화살에 맞은 사자는 피를 흘리며 40여 시간을 헤매다 붙잡혔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어 가던 사자를 치밀하게 뒤쫓던 파머 일행은 마침내 사자의 목을 자르고 가죽을 벗겨낸 뒤 자랑스럽게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 서남 아프리카의 수사자.(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짐바브웨의 마스코트 “세실”의 죽음

그런데 하필, 파머가 죽인 사자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사자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연구 대상으로 선정되었던 짐바브웨 국립공원의 마스코트, 세실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름 없는” 사자였더라면 파머의 사냥은 그저 한여름 휴가의 짜릿한 추억으로 끝나 버렸을 수도 있었겠지요.

파머와 같이 “취미”로 전 세계를 누비며 야생동물들을 사냥하는 “유희”에 의해 희생되는 아프리카 사자 수가 연간 600마리에 이른다고 하니까요. 열 세 살의 수사자 세실은 6마리의 암사자와 24마리의 새끼가 있는 대가족의 가장이었다는군요. 사자무리의 특성상 수컷 사자가 죽으면 죽은 사자의 새끼들은 서열 싸움에 의해 다른 수컷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추구한 쾌락의 결과로 다른 생명들을 응징하는 자연의 인과법칙이 안타깝고 두렵습니다. 언젠가 저 처벌이 인간에게 향하겠지요.

세실의 죽음으로 비롯된 논쟁은 양분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밀렵을 규탄하는 목소리들이 우세합니다. 야생동물 사냥 중단을 촉구하는 온라인 청원서에는 이미 백만 명 이상이 서명했고 (8월 2일 오전 9시 현재), 미 의회와 유엔총회에서도 멸종위기 동물 보호와 야생 동식물 밀렵 및 불법 거래를 차단하는 법안과 결의안이 진행 중입니다. 짐바브웨 당국도 파머의 본국 송환을 요청한 상태고요.

“동물 한 마리의 죽음에 왜 이리 시끄러운가”

하지만 사냥이 대중스포츠로 자리 잡은 미국에서는 이 움직임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며 파머를 옹호하는 목소리들도 들립니다. 엄연히 사냥허가 구역에서 사냥을 했는데 왜 불법이냐, 의사로서 그간 “성실하게” 본업에 충실해 온 파머와 파머의 가족이 그깟 사자 한 마리의 죽음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는 없다, 또 전쟁과 기아 등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동물 한 마리 죽은 일로 전 세계가 들썩거리다니 참 한가하고 유난스럽다, 이런 의견들입니다.

논쟁을 보고 있자니, 신학적으로 “동물의 권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또 “인간의 권리”와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짚어 봐야 할 듯싶습니다.(동물권 논쟁은 식물권 논쟁으로도 이어지지만, 이 글에서는 생략합니다)

동물을 보는 신학의 두 가지 관점

‘동물권’,(Animal Rights) 말하자면 ‘인간 외 동물이 가진 기본권’은 사실 최근까지 신학에서 소외되어 왔던 주제입니다.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 앤드루 린지(Andrew Linzey)(저서: “Christianity and the Rights of Animals”(1987), “Animal Theology”(1994), “Creatures of the Same God”(2007), “Why Animal Suffering Matters”(2009) 등)는 동물의 권리를 신학적 입장에서 규정하고 지지하는 대표적인 신학자인데요, 린지의 “동물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물권에 접근하는 데 기본이 되는 질문을 고민해야 합니다.

즉 개, 고양이, 돌고래, 하이에나, 돼지, 사자 등 동물을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관심을 필요로 하는(혹은 필요로 조차 하지 않는) “대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들도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도덕적 권리를 가진 “주체”로 보느냐는 질문입니다.

어떤 관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동물권에 대한 접근방식과 결론이 달라집니다. 첫 번째 관점은 종차별주의(Speciesism) – 모든 동물들 사이에는 위계가 있으며, 이성이 있는 인간은 위계의 최상위에 존재한다는 논리 – 에 근거하여 인간의 권익을 위해 다른 동물을 식용과 실험 등을 위한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두 번째 관점은 개체주의(individualism) – 종 전체가 아닌 생명체 하나하나가 가진 도덕적 지위와 권리가 승인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논리 – 에 근거하여 고유한 가치를 가진 생명체를 인간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예상할 수 있듯, 이 두 관점 사이에 중재점을 찾기가 쉽지 않죠.

린지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전통은 위의 두 입장을 모두 지원합니다. 둘 중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종차별주의 입장입니다. 중세, 근대를 거쳐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인간 중심적 사고를 견지하며 “동물에게는 이성과 지적 능력이 없고, 불멸의 영체도 없다”,(아퀴나스) “동물은 인간이 느끼는 것과 같은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지각할 능력이 없다”,(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근대신학)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도덕적 의무가 있을 뿐, 동물에게까지 그 의무를 이행할 필요는 없다”, (비오 9세 등)고 주장해 왔습니다. 잔인하게 도살하는 것만 자제하도록 권유할 뿐, 동물에게는 도덕적 관심을 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최근까지도 대세였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비록 소수의 목소리었을지언정, 동물을 존중 받아 마땅한 귀중한 생명체로 인식하고 보호해 온 개체주의 전통 또한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 전통은 동물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귀한 피조물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지요. 인간을 포함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피조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콜로 1,16 참고)

창세기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 인간은 하느님의 세상을 가꾸고 보호할 책임이 있지, 지배하고 착취할 권리는 없습니다. 성서 전통은 피치 못할 필요에 따라서만 살상을 허가하고 있습니다. 긴박한 필요를 찾기 힘든 오늘날에는 동물을 살상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많은 성인들의 가르침은 인간과 동물은 한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무적으로 동물에게 도덕적 관심과 배려를 보여야 합니다.

린지는 개체주의를 옹호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근거하여 “동물권”은 인권의 견지에서 판단되어 질 것이 아니라 신권(“Theos-rights”)의 차원에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Animal Theology, 24) 동물권은 이미 하느님이 각 개체에 부여한 것이기에, 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물권 논쟁은 그 출발점부터 재고되어야 합니다. 동물의 권리는 인간 마음대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권리 수혜의 대상을 선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고민해야 할 것은 동물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동물권을 어떻게 포용하고 보호할 것이냐입니다.(Christianity and the Rights of Animals, 82)

최근 들어 린지뿐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동물권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만, 동물신학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적용될지 아직은 많은 것이 질문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많고 적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동물들에게 빚을 지며 살고 있는 우리 현실을 감안한다면, 린지의 주장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급진적이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채식으로 식습관을 바꿔 보려 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포기해야 했던 저 또한 – 언제든 다시 시도하리라 마음은 먹고 있습니다만 – 린지의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얼마만큼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 치과의사 파머의 병원 앞에 사람들이 (왼쪽부터)"당신은 깊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너의 치과에 가지 않을 거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다", "나는 너의 윤리적 충치를 메우고 싶다" 등 비난하는 문구를 붙이는가하면 동물의 인형을 놓아 두기도 했다. ⓒ조민아

힘 있는 존재를 위한 약한 생명의 희생은 당연한가

하지만 린지의 주장에 무리가 있다하더라도, 그의 종차별주의 비판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여지가 있습니다. 생명들의 위계를 정하고 인간 외의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 신념체계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등의 차별 이데올로기, 즉 자신이 속한 인종과 성별의 이익을 우위에 두고 타인종과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을 차별하는 신념체계와 맥락을 함께하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힘 있는 존재들의 편리와 행복을 위해서 연약한 생명들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오히려 그것이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반생명적인 발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강정, 4대강, 세월호, 최근에는 메르스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 연약한 생명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논리이지요. 반생명의 논리에 교회 전통이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달에도 언급했듯, 회칙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관계 또한 회복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하느님나라를 실현할 책임과 권리를 갖고 사는 “공동의 집”입니다.

교종의 통합적 생태론에 근거하자면 동물보호 의무와 인권 존중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란 측면에서 함께 고민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깟 동물 몇 마리쯤 죽어 나가는게 무슨 대수냐며 무관심을 종용하는 사회, 심지어 말 못하는 생명의 죽음을 통해 쾌락마저 추구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들의 생명 또한 경시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서로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위와 방식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하나의 생명이 돈의 가치로, 실험도구로, 사치스런 보양식으로, 옷의 재료로, 오락을 위한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신앙인으로서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이전에 큰 관심이 없으셨다면 오늘부터라도, 멀게는 사자 세실처럼 밀렵으로 희생당하는 아프리카의 이름 없는 야생동물을 위해, 가깝게는 우리 산하에서 죽어 가는 동물들, 특히 설악산 케이블카 건설 계획으로 서식지를 빼앗긴 산양들을 위해, 또 바로 내 집 앞 먹을 것을 찾아 밤길을 헤매며 생명을 위협 받는 길고양이들을 위해 따뜻한 눈길과 마음 한 자락 깃들여 봄이 어떨까요.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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