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출신의 세계적인 가톨릭 신학자이자 아시아 해방신학의 기초를 다진 예수회 소속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Aloysius Pieris) 신부가 지난 3월 22일, 향년 92살로 선종했다. 그의 죽음은 스리랑카를 넘어 전 세계 가톨릭 지성사에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한다.
1934년 스리랑카 캔디 인근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12남매 중 열째로 태어난 피에리스 신부는 일찍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14살에 소신학교에 입학할 당시 이미 라틴어와 팔리어에 능통했으며, 훗날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해 동서양 10여 개 언어를 구사하는 학자로 성장했다. 1953년 예수회에 입회해 인도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철학과 신학을 수학했고, 1965년 사제품을 받았다. 특히 나폴리 유학 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변화를 목격하며 사회적 의식의 깊이를 더했다.
그는 비불교인이자 가톨릭 사제로는 최초로 스리랑카 스리 자야와르데네푸라 대학교에서 불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종교 간 대화의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서구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아시아의 눈으로 복음을 읽어야 한다”고 역설한 그의 사상은 1988년 출간한 <아시아의 해방신학>(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에 집약돼 있다. 그는 아시아 교회가 진정한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아시아의 깊은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는 ‘요르단강의 세례(아시아의 종교성)’와 고통받는 민중의 가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세례(아시아의 가난)’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선을 넘어 가난한 이들과의 실질적인 ‘연대’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전망은 1974년 켈라니야에 설립한 ‘툴라나 만남과 대화 연구소(Tulana Research and Encounter Centre)’를 통해 실천으로 이어졌다. 툴라나는 종교 간 대화뿐만 아니라 예술과 영화 등으로 복음의 토착화를 모색하는 공간이었으며, 스리랑카 내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회적 기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대중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은, 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열렬한 수호자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개혁을 강력히 지지한 신학적 우군이었다는 점이다. 피에리스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단순한 ‘제도적 개량’이 아닌 주변부에서부터 중심부를 뒤흔드는 ‘급진적 쇄신’의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미완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고 평생 강조했다.
특히 생애 후반부에는 서구 중심의 보수적 전통주의 신학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공격할 때, 교황의 신학적 정당성을 적극 변호하는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난한 이들의 현실과 복음에 기초한 ‘제3세계 신학’의 방법론을 체화했으며, 교황이 추진하는 사목적 쇄신과 ‘시노드 정신’(Synodality) 회복이야말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정한 성취라고 평가했다. 이를 위해 동료 예수회원들과 아시아 교회가 교황의 쇄신 행보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하며 저서 20여 권과 논문 500편 이상을 남긴 세계적 석학이었음에도, 피에리스 신부는 툴라나에서 지극히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학술적 성취보다 ‘청각 장애 아동 교육 센터(CEHIC)’를 공동 설립한 것을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으며, 격동의 시기에 박해받는 활동가들을 숨겨 주는 등 행동하는 지성의 모범을 보였다.
피에리스 신부의 선종에 스리랑카 불교계와 가톨릭계는 애도를 표하며 그를 “종교 간 화해와 정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가교 건설자”로 기렸다. 그가 남긴 ‘아시아적 토착화’와 ‘실천적 영성’, 그리고 교회의 끊임없는 쇄신을 향한 유산은 아시아 교회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 이정표로 깊이 새겨질 것이다.
한편, 그의 <아시아의 해방신학>에 이어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Love Meets Wisdom>(1989)과 <Fire and Water>(1996)는 현재 아시아복음화연구원(구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에서 우리말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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