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안태환]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일반 대중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미디어와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 최근 김용균 노동자의 비극도 단지 ‘위험의 외주화’만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에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자본주의) 체제는 2009년 이후 구조적 위기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나라에서 비판받고 있으며 극복을 위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이 활발하다. 신자유주의체제는 과거의 산업화체제와 질적으로 다르다. 라틴아메리카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1980년대 초반, 우리의 경우는 1997년에 도입되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적 약자(여성, 정신장애인, 비정규 하청 노동자들, 가난한 무주택자, 동성애자, 이주자 난민....)에게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온다. 멀리 갈 것 없이 최근의 김용균 씨 비극을 떠올릴 수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통제받지 않는 경우, 시장이 즉, 사회 자체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마치 소모품처럼 ‘갈아 넣는’ 파시즘적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는 과거에 없던 새로운 상황으로 과거의 국가 위주의 파시즘(예를 들어, 나치즘)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물론 나치즘이 정도가 극심하게 유태인을 완전히 배제하고 대량으로 절멸시키려 했다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소비주의와 불안을 모태로 끊임없는 무한 경쟁 속에서 약자들을 서서히 눈에 안 보이게 ‘배제’하고 있다. 즉, 과거에는 국가가 폭력을 사용하여 사회를 통제하였다면 이제는 사회 자체가 폭력적으로 변화한 것이다.(최근 우리 사회의 도를 넘는 폭력적 혐오를 보라) 예를 들어 사회적 연대 대신에 ‘사회적 파편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각자도생하면서 자신보다 약자를 위계 서열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당연하게(합리적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특히 위계 서열적 차별이 극심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약자들(가난하고 외로운 청년과 노인들)이 자살 외에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IMF위기 전인 1995년만 해도 우리나라에 이렇게 자살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체제는 엄청나게 비민주주의적이다. 이런 폭력성에 대해 포르투갈 출신이지만 라틴아메리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회학자인 보아벤투라 데 소우사 산토스는 ‘사회적 파시즘’으로 부른다. 물론 신자유주의의 이런 절망적 상황에 대해서 창의적으로 응전하는 사회도 많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신생 좌파 정당인 ‘포데모스’(Podemos)가 그렇다. 나는 스페인에 몇 년 전에 갔을 때 어느 식당의 종업원과 이런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스페인은 청년 실업이 아주 심각한 나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우리처럼 그렇게 고통받지 않는 것 같다고 내가 질문했다. 그 종업원의 대답은 사회복지 정책이 탄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가장 아래에서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 집단화하여 집단적 주체로서 출현하지 않으면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엘리트가 해결할 수는 없다. 말만 앞세우는 작동 불능의 의회민주주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18년 12월 말, 광화문광장에서 많은 이들이 비정규 청년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을 추모했다. ⓒ김수나 기자

그런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 스스로가 집단화(공동체화)되어 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문화적 정체성이 가난한 대중이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지도에 의한 계몽적 문화(예를 들어, ‘깨어 있는 시민들의 각성“)를 중시하지 않는다. 특히 가난한 대중이 ‘동네’(barrio)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역사가 깊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1980년대부터 대중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출현했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산업화 시기인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대중이 시골에서 도시로 대거 이주했고 개별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옮겨 도시 변두리에 불법적으로 무허가 건물을 스스로 지어 집단 거주해 왔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거주의 불법성에 기죽지 않고 국가에 그들의 집단적 거주권을 인권으로 요구하고 거주권 외에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삶의 질의 보장을 국가에 요구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또한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가장 아래에서 500년 동안 억압받던 원주민들이 스스로 집단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원주민들이 1990년 에콰도르에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아닌 대안적 모델로 자신들의 공동체 문화가 기존의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문화와 독립적으로 별도로 존중받기를 바라며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1986년에는 이에 앞서 원주민의 집단적 조직을 만들었다. 이 사건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학술적으로나 정치적 사회적 실천으로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우리 사회와 비교하면, 우리는 ‘재개발’, '재건축‘이 그나마 존재하던 가난한 이들의 동네를 파괴한 것을 개발로 발전으로 즉, 자랑으로 인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현재도 그렇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 도시들을 모델로 함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해 그것을 경제적 효율성 즉, GDP성장으로만 인식하고 선진국을 따라가기만 했지 도대체 무엇을 문명적 진보로 해석하느냐는 가치의 문제, 철학의 문제에 둔감했음을 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요구’의 핵심은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며 신자유주의가 약화시킨 사회적 공공성(주거, 교육, 건강권)을 다시 강화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왜냐하면 남미에서는 1940년대에서 60년대까지 고전적 포퓰리즘 시대에 국가가 대중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회적 공공성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서 가장 경제성장이 높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같은 대중의 ‘요구’를 몇 년 전 작고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급진적 포퓰리즘으로 부른다. 과거의 이념적 계급투쟁 이론을 대신하여 현대의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순기능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에 미국과 유럽에서도 우파 포퓰리즘이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 트럼프를 포함하여)

아무튼 신자유주의는 과거의 체제와 급진적으로 다르다. 2차대전 이후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부르며 동시에 산업화 체제라고 한다. 즉, 현대는 산업화체제/신자유주의 체제로 둘로 나누어진다. 우리의 경우, 산업화 체제는 박통과 전통 시대에 해당한다. 이 체제의 특징은 국경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라 내부적으로 불평등이 존재했지만 노동자들이 근면, 성실하면 어느 정도 삶의 질이 나아진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낙수효과가 어느 정도 존재했다.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지금과 같은 ‘배제’는 없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체제는 국경이 없어졌다. 그리고 산업에 비해 금융이 중요해졌다. 상품 시장 외에 자본시장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평등보다 배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문제가 달라졌으므로 대응방안도 달라져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데 지식인과 언론이 이를 심층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소위 ‘태극기 부대’에 대한 대응도 이런 체제전환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전환되지 않아 문제가 더 커진 것 같다.

라틴아메리카 대중은 신자유주의가 약화시킨 사회적 공공성을 다시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젊은이들은 몸으로 겪으면서 ‘헬조선’이란 인식을 보이고 있는데 비해, 특히 많은 기성세대가 이 차이를 잘 모르는 듯하다. 그러다가 이번의 김용균 씨 어머님처럼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의 작업 현장이 상상을 초월하여 매우 참혹한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IMF위기를 계기로 1997년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 구체적으로 공기업 민영화, 거시 경제 안정을 위한 재정의 건전성 중시, 기업의 구조조정(개혁) 등의 다양한 정책 조합을 말한다. 핵심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양산이다. 김용균 씨 비극, 기재부 공무원 신태민의 폭로 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 담론의 외투를 입고 우리에게 왔으므로 그 심각성을 잘 몰랐다. 그럼에도 현 정부를 포함하여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일부 지식인을 제외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다. 최근 대통령도 고용부진의 원인이 제조업의 구조조정 때문임을 밝혔지만 제조업의 구조조정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오는 것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 사회 다수 구성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수사를 썼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사회를 만들겠다.”(이에 대한 비판은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의 '‘개천의 용’은 이제 그만' 참고) 정치 지도자가 대중이 친숙한 수사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이미 시효를 다한 산업화 체제의 수사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체제에 의한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불평등보다 ‘배제’가 더 심각한 문제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 즉, ‘배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언급이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의 학자들에게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입은 자유주의(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세계체제에의 ‘강제적’ 편입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국의 경우에도, 1960년대에서 80년대 말까지 고도성장기로 표현되는 산업화 체제가 작동되었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서도 문제가 많이 드러났음에도 우리 사회는 이 산업화 체제를 계속해서 작동시키길 원했다. 이에 대해 이미 신자유주의라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작동하던 세계 체제가 강제로 우리를 편입한 것이 IMF위기였다고 본다.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은 막강한 힘을 가진 자본주의 체제를 할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결코 ‘순응’하지 않는다. 기회만 있으면 그 체제를 우회하여 자신의 인간적 ‘행복’을 추구한다. 즉, 개인주의적이고 유럽의 합리주의 철학과 연계되어 있는 삶의 방식과 ‘다른’ 그들 스스로의 비자본주의적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최대한 기회만 있으면 발현시킨다. 한 예로, 우리와 달리 선진국적 삶의 방식을 무조건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런 기질은 과거 17세기 유럽에도 '바로크 시대'라고 있었는데 오늘날 신자유주의 위기 국면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문화예술 사조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삶의 방식의 애매성의 의미로 ‘바로크 에토스’라고 부른다.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현재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서 중남미의 역사와 정치, 사회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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