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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특별기고 - 안태환]

나는 신학자도 아니지만 신자들의 삶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의 선한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입에 담기 힘든 비극이 일어났다. 그동안 자주 있어 온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이지만 끔찍한 방식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 너무 크다. 이 비극이 강고한 체제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된 나라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마치 과거에 다른 나라들에서만 있었던 것으로 치부되는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생명을 잃는 일은 거의 없다.

김용균 씨가 소속된 하청기업의 원청은 서부발전이라는 공기업이다. 그렇다면 원청의 원청은 정부다. 즉, 정부가 추진하는 ‘공기업의 효율화’를 위한 ‘민영화’의 하청 방식이 낳은 비극이다.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앞으로 위험업무를 “2인 1조”로 하는 대책도 긴급한 일이지만 이를 넘어 주요 업무의 하청 자체의 금지, 생명 희생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불법파견’의 맥락을 많은 국민이 인식해야 한다. 나도 최근까지 ‘불법파견’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러다 유튜브의 어느 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다. 원청 기업은 김용균 씨 등의 하청노동자들에게 자주 업무지시를 하면서도 그런 일을 부인하고 법적, 제도적으로 하청기업에 책임을 떠맡기는 구조를 불법파견이라고 하는데 이를 정부가 방임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야만성을 돈/생명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거대한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를 개인들의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최근 <경향신문>의 어느 칼럼(한국은 ‘신분제 산업사회’인가)에서 홍기빈은 정규직/비정규직 등 위계서열적 폭력성을 전통사회의 신분제와 비슷하다고 비판하였지만 은유적 표현이라고 해도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가 근대(합리성, 효율성, 산업사회....) 이전의 신분제 사회라고 하는 언술은 우리가 일직선적 진보의 과정에서 뒤쳐진 나라로 인식될 수 있어 더욱 근대성에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 근대성에 올인한 사회이고 오히려 너무나 근대성에 치중한 나머지 위의 비극이 일어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용균 씨가 남긴 유품들. (사진 출처 = SBS뉴스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근대성이 처음부터 그 핵심요소로 위계서열적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세계체제론의 대표적 학자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도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과거 봉건계급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 준다. 

물론 우리가 학교와 미디어를 통해 배우는 주류적 지식은 근대성은 18세기에 계몽주의 철학과 산업혁명에 의해 추동되기 시작하였다고 얘기한다. 그리하여 근대성은 “합리성, 진보, 정치적 민주주의, 과학, 상품생산, 급속한 변화”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은 근대성은 16세기에 스페인에 의한 라틴아메리카 정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을 직접 대면하고 만나면서 이들을 사실상의 노예 신분으로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금은을 약탈한 것이 자본주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원주민을 사람 취급하지 않은 것(철학적 용어로 ‘타자화‘)이다. 여기서부터 식민주의와 인종주의가 시작했지만 헤겔과 같은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를 ‘역사의 진보’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좌파 이념 또는 마르크스주의도 ‘진보’에 몰두하면서 인종주의에 둔감한 맥락에서 근대성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들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비판한다.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인가?

16세기부터 라틴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유럽의 한 지방(서북부)의 문화를 굳이 ‘보편적, 본질적’ 문화로 한없이 격상시켜 놓고 비유럽의 노동력, 자원, 상품의 생산을 통제, 배분, 분류하는 척도로 자신들의 문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근대성과 자본주의의 시작이라는 주장이다. 동시에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도 “공적 자원의 분배와 배분”이 핵심적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근대성과 자본주의, 서구식(보편적 수준으로 격상시킨) 대의민주주의의 숨겨진 성격 자체가 위계서열적 폭력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유럽의 다양한 문화에 내장되어 있는 비자본주의, ‘다른’ 민주주의의 이상과 문화적 가치들의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모습을 재발견, 재구성하면서 유럽문화와 비유럽문화 사이의 수평적 대화가 있어야만 현재의 전 지구적 수준에서의 폭력적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유럽에서 만든 근대성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현재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서 중남미의 역사와 정치, 사회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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