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조현철]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며

지난 27일 광화문 북쪽 광장에서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49재를 지냈다.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지낸 49재가 이번 사고를 둘러싼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 준다. 유족과 시민대책위는 설전에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와대와 정부에 간곡히 요청했다. 이 요청의 핵심에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과 함께, ‘비정규직의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이 있다.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만이 또 다른 ‘용균’들을 만들어 내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다. 현실은 요지부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용균의 외로운 죽음으로 우리나라의 가장 왜곡된 질서인 비정규직제도에는 이미 균열이 일어났다. 20년 넘게 확장을 거듭해 온, 새 정부 들어서도 구호만 있을 뿐 변함이 없는, 날이 갈수록 더욱 교묘해지는, 비정규직이라는 현대판 착취와 죽음의 굴레를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1100만 비정규직노동자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지난해 11월부터 터져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대표 100인과 만납시다.” 요청이자 호소였고, 비명이었다. 거기에 용균도 목소리를 더했다.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유언이 되어 버린 용균의 말이다. 마치지 못한 유언이다. 나머지는 아마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라는 약속을 꼭 지켜 주십시오.”

비정규직 철폐의 요구에 대한 저항과 거부는 조용하지만, 강력하다. 그릇된 질서가 스스로 회개해서 물러난 적은 역사적으로 없다. 예수 또한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서 ‘하느님나라’라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온갖 비난과 위협과 고통을 받아야 했고, 결국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했다. 기존의 왜곡된 질서가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하는지 잘 보여 준다. 용균도 비정규직 철폐를 요청하며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셈이 되었다.

2017년 봄, 우리는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을 몰아냄으로써 문제의 근본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오늘의 현실이 잘 보여 준다. 약자를 지배, 통제하여 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의 강고한 논리는 그대로 살아 있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험과 죽음의 구렁에 빠뜨리는 비정규직 법제도의 실태가 드러나고 있지만, 그 제도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최근 5년(2012-16) 동안 5개 발전사에서 발생한 산재는 모두 346건인데, 이중에서 337건, 97.4퍼센트가 하청 노동자에게 일어났다. 태안 화력발전소가 있는 서부발전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태안과 평택, 서인천, 군산의 4개 화력발전소에서 총 69건의 산재사고가 일어나 13명이 숨졌다. 태안 발전소에서만 58건이 발생해 12명이 사망했다. 전체 사고의 84퍼센트, 사망 사고의 92퍼센트가 태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태안 화력발전소의 노동 환경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이 모든 위험과 사고를 외주화한 원청 기업은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을 받아서, 지난 5년간 산재 보험료 22억을 감면받았다고 한다. 비정규직이 왜 문제인지, 그럼에도 기업과 자본이 왜 갖은 구실을 늘어놓으면서 비정규직 제도를 고집하는지 잘 보여 주는 수치들이다.

예수에게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의 생명이 먼저였다. 그 당시에도 지배 계층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먼저였다. 이들은 기득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 율법과 종교적 관습을 들어 예수를 비난하고 위협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공격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들을 반박했다. 경제적이든 무엇이든,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갉아먹는 법이나 관습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 해방의 하느님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마르 2,27 참조) 예수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서울 광화문에 마련된 고 김용균 씨 시민분향소. ⓒ김수나 기자

비정규직을 옹호하는 갖가지 이유 뒤에는 결국 ‘돈’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요구받는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비정규직 제도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누구를 섬기는지를 결정할 것이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새 정부에도 자본의 기득권 유지에 애쓰는 관료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검토해 보겠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죽음의 구덩이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계속 빠져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검토해 보겠다”고 한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검토를 해 보겠다는 말로 비치지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세월호 참사 때 했던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중립!”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의도야 어떻든 이미 가해자 쪽에 서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기존 질서의 저항이 크다고 해도, 용균의 목숨으로 만들어진 균열이 다시 봉합되어 예전의 질서로 돌아가도록 놓아둘 수는 없다. 반드시 이 균열이 기존의 착취와 죽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굉음을 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렇게 소망하셨던 하느님나라를 지금 여기 만드는 일이다.

기존의 질서는 힘이 세다. 물리적으로 우리는 약하다. 무력하다. 하지만 무력함의 역설, 무력함의 힘이 있다. 무력함에 사랑이 더해지면, 그 무력함에서 힘, 그것도 엄청난 힘이 생겨난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힘이다.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다. 세상의 권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십자가에 달린 바로 그 예수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참조) 용균 엄마는 외아들을 잃었으니, 모든 것을 잃은 셈이다. 그렇지만 용균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다. “너희들, 여기서 어서 나가라.” 용균 엄마가 사고 현장을 처음 방문하고 같은 또래의 청년 노동자들에게 한 말이다. 더 이상 죽게 할 수 없다! 처절한 무력함, 그러나 거기에 아들 또래의 비정규직 청년노동자들을 더 이상 죽음의 현장에 방치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마음, 그 절박한 사랑이 더해지자, 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사람들은 다시 광장으로 나와 비정규직 철폐를 소리쳤다. 그 현장의 맨 앞에는 언제나 용균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 그 옆엔 언제나 용균 이모가 있었다.

용균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이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우리 각자가 이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여, 우리 사회에서 공공부문부터, 위험한 일터부터 직접고용에 의한 정규직 전환이 제도화된다면, 우리 사회는 획기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변모된 세상은 용균이의 사회적 부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면서, 부활의 길이기도 하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 부활로 가는 이 길에 더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길 바란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JPIC양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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