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성탄시기가 지나간다. 이제는 청년이 되어 사막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그분을 만나 뵙는 시기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바로 사막으로 가셨으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고 기록했고, 마태오 복음은 사막으로 가신 예수가 40일간 유혹을 받으셨다고 적고 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왜 굳이 세례를 받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주님의 세례는 자신의 삶의 한 축을 정리하고, 새 삶으로 들어가는 예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모습도 아들로서는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고, 그냥 조용히 더 숨은 생활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나이쯤 되고 보니, 많은 영성가들이 나자렛에서 살았던 그분의 소박한 숨은 생활을 왜 그렇게 동경했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주님의 세례를 축하하는 오늘, 나는 방콕 근처 파타야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주님이 새로운 길을 걸어가심을 기념하는 오늘의 축일은 젊은이들이 열심히 기타를 치고, 불교와 힌두교 양식이 합쳐진 타이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이 성당과 왠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WWA(Women Wisdom in Action, 행동하는 여성의 지혜) 모임을 위해 미얀마,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타이, 필리핀 그리고 미국에서 신학하는 수녀들과 수도자들 50명, 그리고 평신도 두 분이 함께 모였다. “수도생활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21세기의 수도생활 그리고 그 이후의 향방을 함께 모색하는 취지다. WWA는 아시아 교회 간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여성 수도자들에게 신학을 공부하는 자원과 공간을 제공해 왔는데, 이 모임은 그간의 결실을 함께 감사하고, 또 다음의 향방을 함께 식별하는, 좀 특이한 학회다. 여기서 특이하다는 것은 학회에 가면 경쟁심, 혹은 학자로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무리를 하는 피곤한 사람들을 대면할 각오를 해야 하는데, 이 학술회는 그저 자연스럽게 사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매일 발표한 내용들을 놓고 저녁에는 성찰을 하도록 짜여졌다.

이 독특한 학술회의 첫날은 주님의 세례 축일 미사로 시작해서, 모두가 함께 파타야의 거리를 관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워킹 스트릿(walking street)에서 30분을 보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환락 산업이 거리를 메우는데, 한국말도 된 간판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이곳은 성매매 산업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곳으로, 고요한 어촌 마을이 베트남전쟁 중 미국 병사들의 휴가지가 되면서부터 성 관광지로 변해 갔다. 온갖 종류의 호객행위를 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사진들을 버젓이 내보이며 거래를 하고 있는데,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지 현기증이 일었다. 더욱 나를 슬프게 한 것은 거의 벗고 무리를 지어 서 있는 여성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과 그 거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시선들이었다. 상품화된 몸을 욕망하는 자의 시선들.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그 현상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 대는 관광객들. 타이의 섹스 관광, 그리고 유난히 많은 레이디 보이(여장 남자)에 대해서 익히 들어 보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마치 파타야는 도시 전체가 글로벌 자본주의가 욕구를 몸 가져 낳은 거대한 쓰레기 같았다. 이 사람들은 욕구를 따라가는 구조가 낳은 피해자일 텐데, 나는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그들의 부모 형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단지 메마른 그들의 시선이 “하늘나라는 강탈당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성 산업(sex industry) 중심 도시 파타야에 있는 환락의 거리 'walking street'. 글로벌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라고 할 만큼 환락을 사고 파는 긴 거리의 입구 간판이다. ⓒ박정은

안 그래도 나의 주제가 글로벌 독점 자본주의를 살아야 하는 수도생활에 대한 성찰인데, 다시 한번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민낯을 본 느낌이다. 사막으로 가신 예수님이 대면하셨을 그 적나라한 인간의 욕구가, 그리고 그 욕구의 대상이 되었던 수많은 사람의 아픔들이 여전히 엄연한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얼마나 많은 순간,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들을 외면하고, 욕구를 대표하는 상품들을 기웃거리며, 이 물건을 가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 상품이 광고하는 그 잘생긴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두통으로 잠을 설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예수, 그분께 묻는다. 예수님, 당신이 당했다던 그 유혹-배부름, 세상이 혀를 내두를 만큼의 매력과 명성, 그리고 권력-의 뒷골목에서 절망 속에 망연히 서 있던 사람들을 보셨던 거냐고.

21세기를 사는 수녀의 기도는 무엇이어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14세기의 신비가 줄리안 노리치(Julian of Norwich)는 계속되는 전쟁과 죽음 그리고 절망감에 허덕이는 세상을 향해, “모든 것은 잘될거야(All shall be well)”라는 노래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줄리안 성당에서, 평생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난 창을 통해서 세상을 누구보다 깊이 본 이름 모를 신비가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진심으로 사람들과 소통했고, 사람들을 위로했기 때문이다. 

활동 수도회의 성소를 사는 나는, 욕구가 만들어 낸 수많은 폭력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다. 그런 내게 요즘 위로가 된 책이 있는데, “작은 것은 아름답다”이다. 이 책에서 독일의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macher)는 1970년대 에너지 위기가 왔을 때, 크게 되는 것, 즉 많이 사용하는 것이 성공하는 삶이라는 신화를 깨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생태계의 위기를 사는 요즘, 그의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구호는 예언자적 메시지로 들린다.

예수님이 경험하신 것 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끄떡없을 만큼 크고 또 잘 갖추어진 수도회는 그저 우리의 환상일 것이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 그저 세상의 아픔을 감지하는 두세네 명이 함께 기도하고, 무언가 작은 몸짓으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새롭게 써야 하는 수도생활일 것이다. 그래도 홀로 가는 길은 아니다.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한 부르심을 받은 수도자들이 있으니까 함께 링크를 걸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모인 아시아의 수녀들의 모습이 소중하다.

WWA 학회가 방콕 근교 반푸완(Baan Phu Waan) 사목연구센터에서 열렸다. 아시아 곳곳에서 온 신학자 수녀님들과 미국의 수녀 그리고 남성 신학자 평신도 신학자들이 반갑게 한자리에 모였다. ⓒ박정은

어떻게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을 준 사람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이집트의 경제학자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다. 그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연계(link)를 끊어 내는 절연(delink)을 주장했다. 아민은 지금의 자본주의는 미국, 서구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독점 시장 자본으로, 지구의 대다수는 이 체제를 지지하는 데 사용될 뿐이고, 제3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계속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욕구, 거대 생산, 소비의 링크를 걸었다면, 우리는 우정, 간소한 소비 그리고 연대에 링크를 걸어야 한다.

예수님은 욕망의 본질을 보시고, 사막을 떠나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두루마리를 펴 드셨다. 그리고 하느님나라가 오늘 여기에 임했다고 설파하셨다. 예수, 그분의 운동은 결코 크지 않았으며, 많은 것을 소비하지 않았으며, 대신 아주 작은, 그러나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일상 속에 존재해야 하는 사랑의 성사를 세우셨다. 21세기의 수녀는,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또 따라간다. 그녀의 기도는 “주님,  거대한 일을 꾸미지도 않으며, 성공 따윈 바라지도 않으며, 그저 일상에 마주치는 모든 순간에, 우정에 링크를 걸게 하소서.”이다.  모름지기 21세기를 사는, 거룩하지 못한 수녀인 나는 그저 하느님의 빵을 나누는 식탁을 차리면서 작은 자들의 삶에 우정이란 링크를 걸 일이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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