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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윌리엄 그림 신부 (사진 출처 = UCANEWS)

(윌리엄 그림)

겟세마니에서 예수는 말했다.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요즘 교회 뉴스를 보면서 우리가 배신이 늘 가까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아이들과 어른들을 배신하여 자신들이 돌보도록 맡겨진 이들을 학대했다.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은 그런 배신자들을 보호하고 그 자들에게 더 많은 성학대를 저지를 새 기회들을 줌으로써 우리 모두를 배신했다.

교회 안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들은 고발과 위험 요소들을 무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소명을 배신했다. 그 배신은 계속 위로 올라가 마침내는 한 성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까지 이르렀다. 그는 미국의 시어도어 매캐릭의 배신행위들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 된 뒤에조차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또한 멕시코인 사제였던 마르시알 마시엘 데골라도를 “청소년을 위한 유능한 안내자”라고 두고두고 치켜세웠다. (편집자 주- 매캐릭은 여러 신학생을 성학대하였고 한 미성년자를 성학대한 혐의로 2018년에 추기경직에서 물러났다.)

‘그리스도의 군단’(Legionaries of Christ)의 창립자인 마시엘이 청년 남녀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교황청은 풍부하게 갖고 있었고, 이 피해자들에는 그가 거느린 세 “아내”들이 낳은 자기 자식들도 포함돼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최측근이던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도 이 증거를 알게 됐고 믿게 됐다. 그는 (2005년에)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선출되자 재빨리 움직여 마시엘을 처벌했다. (편집자 주- 멕시코에서 창립된 ‘그리스도의 군단’은 교황청립 사제/신학생 단체로, 청소년 상대로 성소 개발에 주력했는데, 미국 등에서 유력한 단체였다, 마시엘이 처벌되고 죽은 뒤, 이 단체는 5년에 걸쳐 교황청의 조사와 감독 아래 회헌을 개정하는 등 개편됐다.)

국법과 (주로 외부에 의한) 사실 공개, 그리고 파산의 위험에 따라 어쩔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가톨릭교회는 이 성학대 위기를 조직적 차원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다루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세상을 배신했다.

우리 모두는 배신은 “한 사람의 신뢰 또는 믿음을 무너뜨리거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남”이라는 것을 안다. 배신당한다는 것은 그 배신을 저지른 자 또는 기관이 우리가 그간 신뢰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반대자가 아니라 우리가 믿어 왔던 자나 기관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고통이 특별하다.

단테는 신곡의 제1부인 ‘지옥’ 편에서 지옥의 한가운데에 유다, 브루투스, 카시우스가 벌을 받는 장소를 놓았다. 유다는 예수를 배신한 자이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카이사르를 배반했다. 이 시에서는, 배신이 가장 큰 죄다. 그리고 지옥에 배반자가 가야 할 특별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단테뿐 아니다.

산티아고 서쪽에서 찍은 십자가. (사진 출처 = UCANEWS)

우리는 모두 배신을 경험하고 살았다. 우리는 모두 배신을 저지르고 살았다. 배신은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런 경험 가운데 하나다.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배신당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무지, 학대 또는 그저 부적절한 행동으로도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배신한다. 어른들은 자기 배우자나 연인에게 배신당한다. 국가들은 반역자나 믿을 수 없는 “동맹”에게 배신당한다. 유권자들은 부패한 정치인에게 배신당한다.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자기 시간과 재능을 다 바치고는 결국 임금이 깎이고 일자리를 잃는 배신을 당한다. 많은 경우에, 고용주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노동자는 (급히 다른 데서 돈을 벌기 위해) 노예 수준의 임금을 받는 위험한 처지가 된다. 경제, 정치 제도는 공동선을 위해 기능해야 하건만 불의와 불평등을 조장한다.

배반자인 것은 “저들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다. 고해성사는 우리 모두가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세상을 위해 사는 그리스도가 되겠다고 약속한 사명을 배신하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의 성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만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배신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있는가? 나 자신은 그럴 수 없는 것이 분명하고, 만약 당신이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진실을 배신한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까지도 배신한다. 나는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고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나 자신을 육체적, 정서적, 영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더 잘 돌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삶 자체가 우리를 배신한다. 병들고, 다치고,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열정과 능력은 조금씩 깎여 가서 마침내 삶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내버리고 도망친다.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에게조차 배신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하느님에게 배신당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좋은 길동무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기 전에 외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는 자기가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의 외침이다.

배신하고 배신당하면서, 인간은 배신 속에 빠져 산다.

니콜라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영화로 옮기면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배신을 보여 주는 강한 장면을 내놓는다. 예수가 십자가 앞에서 돌아서는 장면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느낀 최후의 유혹이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그대로 충실해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저버리려는 유혹이다. 그 소설과 영화에서, 실은, 예수는 배신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충실한 사람이며, 우리들 가운데 유일하게 믿을 만하게 충실한 사람이다.

배신의 뿌리는 두려움이고, 우리의 두려움은 가장 두려운 것, 즉 죽음에 뿌리를 둔다.

예수는 다른 이들에게 배신당할 때조차, 심지어 하느님에게 배신당할 때조차, 배신을 거부하면서 배신의 보편 법칙을 박살 낸다. 그리함으로써, 그는 배신의 뿌리인 죽음의 힘을 짓이겨 버리고 새 생명, 배신이 없는 삶, 배신의 뿌리인 죽음의 공포가 없는 삶을 우리들 모두가 살 수 있도록 한다. 예수가 배신의 유혹을 거부했기에 그는 우리가 죽음을 극복할 길을 연 것이다.

(이 글은 2018년 9월 26일에 처음 출판됐다.)

(윌리엄 그림 신부는 <아시아가톨릭뉴스> 발행인으로서,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메리놀회 소속이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my-betrayer-is-at-hand/83415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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