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다

(윌리엄 그림)

내가 아는 대부분 신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성직자(주교들 포함)에 의한 아동 성학대가 은폐됐던 것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며 실망스럽고 역겹다.

미국, 유럽, 호주 그리고 곳곳의 주교들이 합창단을 이루어 우리에게 노래와 춤을 선보이고 있는데, 자기들은 그간 일어난 일이 무지하게 싫으며 이제는 그런 추문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내용으로, 내 입맛만 더 떨어질 뿐이다.

지금 주교들이 이 무대에 올라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은 무엇이 올바른가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언론과 정부당국의 집중적 관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럴 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하느님백성에게 충실하지 못했음을 드디어 깨달았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위선적 발언들은 무가치하다. 나로서는 “주교”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그의 삶과 행위로 그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입증할 수 없다면 절대 믿을 수 없고 믿지도 않을 것이다. 증거를 제시할 책임은 이제 그 족속에게 있다.

그렇다, 그들 가운데에는 좋은 이들이 있다. 내가 직접 아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예외일 뿐이라는 것이 갈수록 분명하다. 전체로 봐서, 주교들은 자기들의 이미지, 자기들의 권위, 자기들의 특권, 그리고 자기들의 돈을 정의와 자비보다 더 신경 써 왔고 갈수록 더 그러고 있다. 그들이 한 묶음으로 ‘내 탓이오’라고 하는 것은 가치 없는 연기다. 책임을 받아들이고 사퇴하기는커녕 자기들이 책임 자리에 눌러 앉아 상황을 바로잡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그들의 선언은 이제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웃음은커녕, 오직 야유만이 적합한 반응이다.

미국에서는, 주교들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자신들이었음은 (2000년대 초반에) 자신들이 만든 아동보호에 관한 엄한 지침에서 주교들을 제외한 데서 자명하다. 이 지침은 학대 사제들과 기타 교회 일꾼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크게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 규정에서 자신들을 제외함으로써, 주교들은 여전히 자유롭게 은폐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학대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나나 다른 이들이 왜 그들을 신뢰해야 하는가? 그들은 감히 불경스럽게도 교회라고 부르는 일종의 바알에게 기꺼이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것을 이제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말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쩌면 저지르고 있거나 기꺼이 저지를 또 다른 배신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상은 내가 최근에 참석한 한 미사에서 내가 기도를 드리던 중 들었던 여러 생각들이다. 분심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또한 나와 우리 모두가 주님께 고해야만 할 진짜 관심사들이었다. 내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그 기도 같지 않은 기도에 대한 답 비슷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사 참석자들이 한 성가를 부르기 시작해서 내가 분심에서 깨어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1월 12일 볼티모어에서 열린 미국 주교회의 총회장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사진 출처 = UCANEWS)

1860년대에, 남아프리카의 성공회는 존 콜렌소라는 한 주교가 이교(교회분열) 상태라는 비난들로 심한 상처를 받고 있었다. 지금 보면, 그는 그가 말한 바의 대부분이 아마 옳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당시 남아프리카 성공회는 그 때문에 분란에 빠져 있었다. 결국 (성공회의 본부가 있는) 영국에 판정을 구하기로 했다.

그때, 1866년에, 영국 성공회의 한 사제인 새뮤얼 스톤 신부는 이 논란에 대한 응답을 담은 가사를 하나 썼는데, 이 가사는 지금도 가톨릭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교 종파에서 새뮤얼 웨슬리의 곡에 붙어 불리고 있다.

“교회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시다.”(The Church's one foundation, 교회의 참된 터는)

천사들이 아니다. 성인들도 아니다. 교황들도 아니다. 주교들도 아니다. 사제들도 아니다. 수사, 수녀들도 아니다. 서로들도 아니다. 기도도 아니다. 성사도 아니다. 예식도 아니다. 조직도 아니다. 제도도 아니다. 건물도 아니다. 신학도 아니다. 교회법도 아니다. 교리교육도 아니다. 오래된 관습도 아니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입장도 아니다. 공의회도 아니다.

우리가 서 있는 하나이고 유일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다.

주교들은 우리를 사막 안으로 끌고 왔는데, 이 사막은 우리가 그 경험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의 신앙을 정화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집단인) 백성(People, 인민)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우리가 하나인 반석으로 삼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이 세상의 “종교적”인 것들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대치하도록 허용해 왔다. 우리는 이 반석이 우리가 그 반석 위에 덧붙인 여러 장식이나 모든 건축물로 가려 보이지 않게 허용해 왔다. 이런 부착물들에 초점을 두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쳐 왔다.

전체 교회가, 그 가톨릭적 입장을 포함해, 그리고 어쩌면 특히 그것에 대해, 새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500년 전의 제1차 종교개혁 때처럼, 우리는 예수를 원천에서 알기 위하여 성경 안의 하느님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더 깊게 해야만 한다. 우리는 공동 예배 속에서 다른 제자들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성사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우리의 신앙과 삶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으로 삼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매들과 형제들, 특히 신체와 마음과 정신이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봉사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반석으로 삼고서, 우리는 전진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우리와 세상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었던 그런 것들을, 그런 주교들 포함, 뒤로 하고서.

(윌리엄 그림 신부는 <아시아가톨릭뉴스> 발행인으로서,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글은 미국 뉴욕에서 썼다. 메리놀회 소속이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the-catholic-churchs-one-foundation/83871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