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죄에도 경중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문제를 낸다면, 응답의 대부분이 “있다”일 것입니다. 최근 알게 된 사실 즉,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무지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상적인 법은 범죄에 대해 합당한 형벌을 집행할 것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죄의 무게가 다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죄의 종류를 가름해 보면, 우선, “원죄"와 그 외의 죄인 “본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죄는 다시 “대죄"와 “소죄"로 나뉘게 됩니다.

원죄는 아시다시피, 최초의 인간이 지은 죄입니다. 인간의 교만이 그 원인이라고 합니다만, 하느님을 어설프게 닮아 있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 주는 흔적입니다. 그래서 원죄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하느님의 완전함을 추구해야 할 운명을 지닌 존재임을 알려 주는 표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죄를 구성하는 한 가지인 대죄를 "죽을죄"(mortal sin)라 하고, 다른 한 가지인 소죄를 "용서받을죄"(venial si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오늘의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죄와 소죄를 구분짓는 기준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입니다.

1) 그 사안이 "중한 것"이다. 
2) 그 심각성을 죄를 범하는 이가 "알고 있어야" 한다.
3) 죄를 범하는 이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했어야 한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대죄가 성립됩니다. 중한 사안이란 보통 십계명에서 다루는 내용들입니다. 하느님과 나, 이웃과 나, 이 관계에서 자라나야 할 사랑을 심각하게 깨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대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그 중대함을 범죄한 당사자가 인지하고 있었고, 의도적이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와는 달리, 위의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결핍되는 경우에는 소죄가 됩니다. 소죄는 대죄보다 가벼운 것인 만큼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을 수 있는 것이라서 현실적으로 우리를 더 낙담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또 저지르다니.... 하는 자책이 반복적으로 밀려올 수 있습니다. 소죄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삶이 무질서하게 진행될 때 짓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책임을 회피하여 동료들에게 암암리에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일곱 가지 악덕을 교만, 인색/욕심, 질투/시기, 분노, 음욕, 탐식, 나태로 정리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우리는 인간적인 헛점으로 인해 언제든지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잘 성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삶이 죄와 관련하여 어떤 경향성을 띠는지 살필 수 있는 일곱 가지 악덕을 정리했습니다. 이것을 7죄종이라고 합니다. 교만(라틴어 superbia/영 pride), 인색/욕심(avaritia/greed), 질투/시기(invidia/envy), 분노(ira/anger), 음욕/사음(luxuria/lust), 탐욕/탐식(gula/gluttony), 나태(acedia/sloth)가 그것입니다.("천주교 용어집" 참조) 

나의 내면에 이런 경향들이 있군! 하며 인식하는 것까지는 별문제 없으나, 주체인 내가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에 집착할 때는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교만이 느껴지면 더욱 겸손해져야 함을 의식하고, 인색함이 느껴지면 자선을 베풀고자 시도하며, 질투가 나면 그 대상에게 친절을 베풀려 애쓰고, 분노가 일어나면 숨 한번 크게 쉬면서 인내하고, 음욕이 일어나면 그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인식하여 상대의 존엄함을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탐식 앞에서는 절제를 구합니다. 마지막으로 나태에 대한 처방전은 근면해지는 것인데 보통 친구와 약속을 하고 이것을 지켜보려는 노력을 통해 개선해 나갈 수 있습니다. 

죽을죄를 지으면 지옥에 떨어지는 수밖에 다른 것이 없겠군....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죄를 죽을죄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죄의 중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모든 죄들은 참회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흠 많은 우리들이지만, 더 열심히 봉사하고 더 크게 사랑하고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모습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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