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의 '세븐' - 12]

세종 9년, 형조판서 노한은 길을 지나다가 여자 노비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사람의 형용과 비슷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비할 데 없는” 상태였다. 한 젊은 여인이 굶주림에 거의 죽게 된 것을 본 노한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유를 묻게 되었고, 곧 엄청난 사실을 세종에게 고하게 되었다.

“집현전 응교 권채는 일찍이 그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는데, 여종이 병든 할머니를 문안하고자 하여 휴가를 청하여 얻지 못하였는데도 몰래 갔습니다. 그래서 권채의 아내 정 씨가 권채에게 호소하기를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자 하여 도망해 갔습니다’ 하니, 권채가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 속에 가두었습니다.... 음식을 줄이고 핍박하여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하였고, 구더기가 생긴 오줌과 똥을 덕금이 먹지 않으려 하자 침으로 항문을 찔러 덕금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는 등, 수 개월 동안 침학하여 잔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4일 기묘년(서기 1427년)

▲ 신윤복. (18세기 말) 월야밀회(月夜密會).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 달밤에 다른 여인과 밀회하는 남편을 본처가 엿보고 있다(추정).(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시기와 질투는 흔히 비슷한 말로 사용되지만, 사실 약간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phtbonos)에 대해서 상대방이 잘되거나 혹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느끼는 좌절감과 미움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질투(zelos)는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 즉 상대방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여 슬퍼하고 속상해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시기는 “네가 가진 것이 미워”이고, 질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슬퍼”다.

질투는 주로 자신의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이기 때문에, 삼각관계에서 종종 나타나는 감정이다. 내 남자 혹은 내 여자의 사랑을 다른 이가 가져갈 것 같은 두려움이다. 시기(envy)는 아주 심각한 죄를 낳는 칠죄종의 하나이며, 아무리 보아도 그 장점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질투(jealousy)는 잘만 조절하면 열정과 열의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대개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는 고통 혹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수많은 죄악이 번성하는 토양이 되곤 한다.

▲ '시기(Invidia)', 대 피터르 브뤼헐. (1558)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다고 여기고 늘 슬퍼한다. 혹은 상대방이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 갈 것이라며 전전긍긍한다. (이미지 출처 = nippon.com)

권채는 세종에게 촉망받는 학자이자 관리였다. 심지어 세종은 권채를 불러 “내가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글을 읽혀서....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라고 한 적도 있었다. 출근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권채는 이 사건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사실 권채의 잘못은 아내의 모략에 속은 것뿐이지만, 집안을 잘 단속하지 못한 그에게 내려진 벌은 엄중했다. 모든 벼슬을 잃고 멀리 유배 가게 되었다. 주범인 아내 장 씨는 장 90대를 맞는 중형을 받았다. 장형은 무거운 죄를 지은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인데, 대명률에 따르면 최대 한도가 100대다. 역모죄도 아닌 노비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 부녀자 장 씨에게 내려진 장 90대는 예외적인 엄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권채나 아내 장 씨의 이야기는 실록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한 여인인 첩에 대한 질투심이 가문 전체를 몰락시킨 것이다.

▲ '질투', Antoine K. (2012) 종종 질투는 남녀 간의 삼각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특정 대상의 관심을 다른 이가 가져가거나 혹은 가져갈 것이라는 불안은 남녀 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십대 소녀들은 친구 관계에서, 종종 동성 간의 질투를 경험한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질투는 다툼과 중상, 모략, 뒷담화를 낳는다. 상대가 가진 것을 빼앗고 싶어한다. 상대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노력하며, 없는 말을 지어내서 공격한다. 흔히 대중 매체에서 질투는 여성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질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질투는 직장 생활에서 큰 문제가 되곤 하는데, 상사가 능력 있는 부하 직원에게 느끼는 불안감이 바로 이러한 질투다. 여성이 남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직장에서 인정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다.

젊고 패기 있는 부하 직원의 업무 능력을 보며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괴롭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질투의 원인은 질투심을 품은 사람의 열등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 표적이 된 부하 직원이 아무리 노력해 봐야 별로 나아지는 것은 없다. 종종 “부하 직원을 교육하려고 일부러 어려운 과제를 준다”는 식으로 합리화하지만, 사실 능력과 패기를 갖춘 젊은 부하가 미워서 그러는 것뿐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질투는 모든 인류, 아니 모든 영장류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자신의 번식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인간은 배우자를 자신의 손안에 쥐고 싶어한다. 긴 진화사를 통해 남성은 육체적인 힘 그리고 사회 제도를 통해서 여성을 강압해 왔지만, 여성은 주로 질투라는 감정을 통해서 자신의 남성이 다른 여성에게 마음을 두지 않는지 견제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이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상대방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도 파멸에 이르게 된다.

심각한 형태로 질투가 진행하면 부정 망상이라는 정신병리학적 상태로 진행할 수 있다. 끊임없이 아내 혹은 남편의 정조를 의심하는 것이다. 일반으로 의처증, 의부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가 상상 속의 상대와 불륜을 저지른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명백한 증거와 근거를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 치료해도 잘 낫지 않는다.

▲ 질투(jealousy), 에드워드 뭉크. (1895) 망상에는 피해망상, 과대망상, 부정 망상, 빈곤 망상, 신체 망상 등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그 중 부정 망상의 치료는 아주 어렵다. 현실 세계에서 불륜과 부정은 종종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no.wikipedia.org)

“오! 군주여, 질투를 조심하소서. 질투는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며 그 고기를 먹는 녹색 눈을 가진 괴물입니다. 부정한 아내를 두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남자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요. 그러나 아내를 의심하며, 동시에 그 아내를 숭배하는 남자는 얼마나 불행한지요. 그는 의심스러운 아내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 The Tragedy of Othello, the Moor of Venice"에서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건네는 말이다. 오셀로에게 원한이 있었던 이아고는 오셀로를 꾀어,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의 정절을 의심하도록 계략을 꾸민다. 결국 오셀로는 아내를 죽이지만, 나중에 속은 사실을 안 오셀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래서 의부증이나 의처증을 흔히 오셀로 증후군(Othello syndrome)이라고 하기도 한다.

▲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알렉산드르 마리 콜린. (1829) 베네치아의 장군 오셀로는 자신이 유일한 무어인, 즉 흑인이라는 사실에 힘들어 한다. 원한을 품은 부하 이아고는 이런 오셀로를 파멸시키기 위해, 오셀로의 아내 데스데모나가 바람을 피운다는 모략을 꾸민다. 질투에 눈이 먼 오셀로는 아내를 침대 위에서 눌러 죽인다. 뒤늦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오셀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미지 출처 = no.wikipedia.org)
질투는 자신의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원래 자신의 것이란 없다. 특히 이성의 사랑이나 세상의 인정 같은 것은, 정말 변덕스러운 것이라서 혼자 애를 태워 봐야 별 소용이 없다. 눈먼 질투는 애꿎게도 죄 없는 상대를 괴롭히고, 결국 자신의 삶도 나락으로 이끌게 된다.

종종 대중매체에서 질투, 특히 여자의 질투는 무죄라고 하곤 한다. 물론 젊은 남녀의 귀여운 사랑 싸움을 좋게 표현한 말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근거 없는(물론 가끔은 근거 있는) 각종 질투로 인해 정신과 진료실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마음속의 강렬한 질투심과 불안을 사랑의 크기로 착각하곤 한다. 자신도 질투하고 또한 상대도 질투하도록 유도하면서,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믿는 것이다. 질투하려면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려면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

 
박한선
경희대 의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대부속병원 전공의 및 서울대병원 정신과 임상강사로 일했다.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및 이화여대, 경희대 의대 외래교수를 지내면서,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 연구 중이다. 현재 호주국립대(ANU)에서 문화, 건강 및 의학 과정을 연수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2014)을 번역했고, "재난과 정신건강"(공저, 2015),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2016), "어머니 혹은 여자, 진화의학으로 살펴본 여성의 건강"(2017) 등을 저술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