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의 ‘세븐’ - 3]

 2124시간. 한국 근로자의 일년간 평균 근로시간이다. 1983년 무려 2714시간을 기록한 뒤로 점차 낮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전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사실 한국인의 근면함은, 자타가 공인하는 독특한 국민성이다. 한때 부실성장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빨리빨리’ 정신은 한국의 고도압축성장을 이끌어 낸 일등공신으로 칭찬받기도 한다. 우리의 부지런함은 종종 독일인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실제 독일인의 연간 근무시간은 1371밖에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짧다. 그러니 한국인이라면, 일단 나태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실 칠죄종에서 말하는 나태란, 단지 육체적 게으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수도자 카시아노는 나태와 우울을 나란히 죄의 목록에 올렸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나태’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었다. 나태가 우울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반해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두 가지 죄악을 ‘우울’이라는 개념으로 묶었다. 우울이 결국 나태를 유발하기 때문에, 같은 죄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칠죄종에서 말하는 나태란, 우울과 깊이 연관된 어떤 심리적 상태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우울 장애를 여러 종류로 분류한다. 흔히 알고 있는 우울증은, 주로 ‘주요 우울장애’를 뜻하는데, 주로 식욕이나 체중, 수면 양상의 변화, 자살 사고, 우울한 감정과 비관적인 생각 등이 비교적 급성으로 나타나는 임상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서 기분부전증은 우울한 감정은 뚜렷하지 않으나, 수년 이상 무기력, 활동력의 저하, 만성적 우유부단함, 낮은 자존감 등의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과거에는 신경성 우울증 혹은 우울 인격장애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소설가였던, 도러시 L. 세이어스(Dorothy Leigh Sayers)는 나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아무 것도 간섭하지 않고, 아무 것도 즐기지 않으며,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 것도 미워하지 않으며, 아무 것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욕증과 무쾌감증이라고 하는 상태다. 일반적 우울증이 몹시 슬프고 절망적인 기분을 주증상으로 보인다면, 나태한 우울증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나태'.(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나태에 빠진 사람이라고 해서 근면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계추처럼 직장과 집을 왕복하며, 늘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직장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일은 없지만, 또한 별다른 주장이나 욕심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적도 잘 만들지 않는다. 그저 늘 미적지근한 태도로 지내기 때문에, 오히려 인사고과에서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감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태는 어떤 것을 행하여 짓는 죄가 아니라, 행하지 않아서 짓는 죄라고 한다. ‘주인에게 한 탈렌트를 받았으나 그냥 땅에 묻어 둔 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죄라고 할 것까지 있을까? 사실 기분부전증 환자의 상당수는 이미 그러한 삶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일이 드물다. 종종 ‘나는 아무 것도 이루고 싶지 않아.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가고 있는 것일 뿐, 나는 내면의 속도에 맞춰서 살고 싶어’라며 항변하고는 한다. 하지만 나태를 ‘노자의 무위자연’이나 ‘느림의 미학’과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대부분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여기기는커녕, 끊임 없이 반복되는 지루함과 일상을 스스로 저주하게 되고는 한다.

그래서 시어도어 밀런(Theodore Millon)은 이러한 우울증의 양상을 ‘자기폄하적 우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롱하고, 폄하하며, 역겨워 한다.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내적 연민에 빠져서, 늘 푸념과 한숨, 원망 속에 하루를 보낸다. 잠시만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이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에 대해서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소위 ‘불쌍한’ 자신을 향한다.

끊임 없이 주어지는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당신은 아마, ‘나는 다른 죄는 몰라도, 나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태의 핵심은 바로 건강한 관심의 부재다. 세상일의 부조리와 주변 사람의 어려움에 무관심하고, 스스로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무의욕증이나 무쾌감증의 양상이다. 불의에 맞서 목숨을 걸라는 뜻이 아니다. 부서 간 혹은 동료 간의 업무 떠넘기기, 작은 부조리에 대해서 눈을 감는 것, 혹은 주변 사람의 기쁜 일에도 냉소적인 기분이 되는 것은 누구라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선한 일들이 ‘귀찮아서’, ‘싸우기 싫어서’ 혹은 ‘내 일이 아니라서’라는 이유로 미뤄지고 있을까? 표면적 일상의 분주함은, 사실 자신의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심각한 수준의 기분부전증이라면,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나태함으로 물든 삶이 단지 약물치료나 몇 번의 상담으로 금세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실 기분부전증은 주요 우울장애보다 증상은 가볍지만, 어떤 의미에서 치료가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약물치료와 더불어서, 긴 시간의 정신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삶의 목적성을 다시 찾고, 미래에 대한 상실된 믿음, 세상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다시 세워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적 소명의식을 찾아 내고, 소망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도 자는 인간을 깨우지는 못한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내적 나태와 무기력감에 빠져 기계처럼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면, 일단 그 잠에서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이 칼럼은 필자의 나태함 때문에, 마감을 넘겨 송고되었습니다.)

 
 
박한선
성 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성 안드레아병원 영성과 사회정신연구소 연구소장
성 안드레아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환자를 돌보는 한편,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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