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의 '세븐' - 9]

도덕적 원칙을 우선시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한 젊은 이상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지식인과 농민이 함께 힘을 합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춘과 도박을 금지하고, 향락적 문화를 배격했으며, 사람들을 학력이나 재산, 신분과 관계없이 똑같이 대하려고 하였다. 죄를 지은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하게 처벌하였다. 아이들은 국가에서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는 부족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치와 향락에 물든 도시주민들을 시골에 보내기로 했다. 모든 사람은 검은 옷을 입어야 했다. 가족들은 같이 식사를 할 수 없었는데, 가족제도는 부정부패의 근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도 모두 폐쇄했다. 진정한 교육은 논밭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폴 포트,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 캄보디아 총리 재임 시절, 조국을 이상적인 농업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이미지 제공 = 박한선)

부는 악의 근원이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 예를 들어 자동차나 라디오 같은 비싼 물건을 가진 사람은 교화소에 끌려갔다. 나중에는 아예 화폐 자체를 없앴다. 전화도 없앴다. 외국과의 무역도 중단되었다. 의사나 교수를 모두 처형했고, 학교와 병원은 폐쇄하였다. 종교도 금지했다. 신부와 목사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종파를 막론하고 교회가 전부 사라졌다. 일주일에 두 번씩, 그들은 모두 모여 잘못을 자백하고, 서로 비판하고 죽였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증오했고 서로 분노했다.

분노(Ira)는 아주 기본적인 감정 중에 하나다. 종종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옳지 못한 일을 경험했을 때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나타난다. 그래서 분노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이 의로운 용기, 혹은 고귀한 저항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분노의 원인은 늘 다른 사람에 있기 때문에, 분노가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분노하게 만들었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겉으로 흥분하고 화낸 것은 잘못이지만, 분노할 이유는 확실했어’라는 식의 반쪽짜리 후회다. ‘분노’, 즉 무엇인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인식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격렬한 반응 중에서 ‘격렬한 반응’만 후회하는 것이다. 부당하다는 인식 자체도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수준의 통찰적 후회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주 분노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나는 옳고 선량하며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분노의 대상이 되는 타인은 그릇되고 악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폄하한다. 본성 자체가 글러 먹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 분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어려운 말로 자기애적 소망의 좌절에서 시작한다.

▲ 일곱 가지 대죄 중 '분노', 대 피터르 브뤼헐. (1558)

처음에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특정한 대상에게 분노한다. 나를 버린 연인, 나를 해고한 상사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서, 집단 전체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한다. 특정한 이성에 대한 증오가, 남성 혹은 여성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혹은 해고당한 경험이 기업 전체에 대한 불신이나 기성세대 전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분노의 최종 단계는,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을 다 미워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 테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인-캄푸체아 공산당의 다른 이름)의 지도자 폴 포트가 집권한 약 3년 반 동안(1975-79), 캄보디아에서는 약 150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처음에는 소위 ‘반동세력’, 즉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주 대상이었다. 하지만 점차 분노의 대상은 넓어져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도시에 살아 본 사람’, ‘외국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도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는 ‘안경을 쓴 사람’이나 ‘손에 굳은 살이 없는 사람’도 모조리 끌려가서 죽었다. 결국 몇 년 만에, 전체 인구 1/4이 죽었다. 좀 더 집권했더라면, 모조리 서로 죽이고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 복음서(공동번역)에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인터넷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모두가 모두에게 서로 성내고 욕하고 있다. 가히 ‘분노의 사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심지어 일단 ‘분노하라’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의 불의를 보고 참지 말라는 말이지만, 목적이 정당하다고 ‘분노’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세상에는 참 화나는 일이 많다. 어떨 때는 정말 마땅히 화내고 분개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화를 내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설득시켜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분노의 에너지는 마치 세상을 바꿀 것처럼 강력해 보이지만, 결국 그 자체의 힘으로 무너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들은 언뜻 의심할 여지 없이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은 절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매춘과 도박, 술, 사치, 부정부패가 옳지 못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인다. 크메르루주도 그렇게 생각했다.

▲ '인간 횃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민족회의 지지자가 반대 당원을 불태우는 사진, 그렉 마리노비치, 1991년 퓰리처상.

옳지 못한 사람, 나쁜 사람, 심지어는 천하의 악당이라도 포용해야 한다. 알고 보니 사실 악당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을까? 설령 100퍼센트 확실한 악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성경에는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고 하였다. 어떤 자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당신에게 마땅히 그를 욕하고 미워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 부조리에 무조건 침묵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노와 증오 자체는 어떤 부조리도, 어떤 갈등도 해결할 수 없다. 진정한 용기와 무분별한 분노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현대 사회의 집단적인 분노 수준이 점점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분명 과거보다 풍요로워졌음에도, 남자와 여자가, 금 수저와 흙 수저가, 갑과 을이, 좌와 우가, 젊은이와 나이든 사람이 서로에게 분노하고 있다. 모두가 모두를 미워하고 증오한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 “‘눈에는 눈’을 고수한다면 세상에는 장님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박한선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영성과사회정신연구소 연구소장
성안드레아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환자를 돌보는 한편,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호주국립대에서 문화와 건강, 의학 과정을 밟으며, 아보리진 사회를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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