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10월 28일(연중 제30주일) 예레 31,7-9; 히브 5,1-6; 마르 10,46ㄴ-52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극적 테마를 지닌 한 편의 드라마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단연코 ‘예수와 바르티매오’. 복음서는 유대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하층민 눈먼 거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왜일까? 대부분 역사의 서사가 그렇듯이 세계는 ‘위대한 자들’만을 기억하고 기록에 남긴다. 한 세대에 70억이 살아가도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나머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런 역사의 법칙에 반하여, 역사가 잊어버리고 지나친 그 잉여의 사람들, ‘나머지’들을 소환하여 무대 위로 등장시킨다. 예레미야는 자기 목소리와 이름, 얼굴을 되찾고 돌아오는 이들의 가슴 벅찬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들려 준다.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려오고 땅 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예레 31,8-9)
예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되게 하였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아니 ‘바르티매오들’이 어떻게 역사의 무대 위로, 약속의 땅(하느님나라)으로 돌아오는지를 보자. ‘나머지’로 살아온 이들은 예수가 지나가는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더 정확히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자신보다 훨씬 더 우월하고 좋은 위치를 점령한 자들이 “잠자코 있으라”(마르 10,48)고 막아서는데도 이에 굴하지 않는다. 결국 예수는 가던 길을 멈출 것이고, 모든 ‘바르티매오들’은 예수로부터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는 응답을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 세상의 눈먼 현실에서 깨어났다. 차가운 바닥에서 ‘오라’는 부름을 들은 자, 온갖 조소와 멸시, 절망에 갇혀 지내던 자들이 마침내 일어섰다. “그들은 울면서 오겠지만 웃게 될 것이다.”(예레 31,7)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예수의 산상설교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할 ‘가난한 이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들은 모두 기쁜 소식의 우선적 수혜자들이다. 사렙다의 과부도, 시리아의 나아만도, 예수가 칭송한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인도, 백부장도 (....) 성경의 모든 “남은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이 좇는 열망이나 신으로부터 돌아섰다는 것, 전혀 다른 세상을 희망하며 그 세상이 가능하리라는 데 의심을 품지 않았다는 것, 세상이 욕망하는 시선을 거부하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삶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버린 길 끝에서, 현실감 없는 소리라고 비웃으며 떠난 자리에서, 헐벗은 거기서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었다. 세상의 경계에서, 오랜 동안 기다려 온 세계를, 그 세계가 다가오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마침내 자신들을 잊지 않고 부르는 ‘한 소리’와 마주칠 것이다. 이렇게 기쁜 소식은 느닷없이 기다리던 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느님나라’가 어떻게 낡은 세계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들어오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 이야기는 섣부르게 끼어든 여느 에피소드가 아닌 것이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의 말씀은 기적의 말미에 따라오는 관용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 한 사회와 공동체의 맥락을 통해 실현되는 해방의 언어다. 그래서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맹목적이 될 수 없으며, 종교적 색채를 띤 나르시시즘적 행위도, 습관적으로 신을 부르고 주문을 외는 이교적 행위도 아니다. 믿음은 운 좋게 살다가 걸려든 전유물이 아니며, 혹독할 만큼 냉정하고 복잡한 현실을 마주한 자들의 것이다. 그것은 대중 속에 자리 잡은 거짓 신념과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진실을 가로막는 숱한 편견과 억측에 맞서 성장하고 획득된다. 오늘 교회 앞에 나선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그렇게 세상에 나와서 세상과 맞서 세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빛을 막아선 자들을 물리치고, ‘그들 식의 통념’에 꺾이지 않은 채 예수 앞으로, 역사의 무대로 걸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 신앙은 어떤가? 기쁜 소식의 선포자라 하기엔 너무 멀고 위태롭지 않은가? 최근 각종 뉴스에 등장하는 종교계의 비리는 참담해서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하다. 과거에는 4대 종교와 이단의 차이가 선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그 경계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히려 교세가 큰 종교일수록 하루가 멀다하고 대형사고를 친다. 고위 성직자 비리는 하도 많이 등장해서 식상할 정도다. 최후까지 믿을 수 있는 보루는 ‘종교(종교인들)’라 하는데 대부분의 적폐가 이들과 연루되어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정화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젠 모두 두 손 놓은 듯하다. 예수시대처럼 신도든 성직자든 ‘눈먼 자들’(요한 9,39-40)은 항상 있기 마련이라고 위안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들에게서 예수는 자신들의 현세적 재산과 사후를 위해 들고 있는 여러 보험 중 하나이며, 가고자 열망하는 천국 역시 쇼핑목록에 지나지 않은 건가? 자신들의 욕망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세와 권력을 동원해 성무를 사고파는 행위쯤 아무것도 아닌 일인가? 이는 곧 예수를 사고파는 행위가 아닌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교회 역시 시장만능주의에 빨려들고 있다. 전 세대에 걸쳐서 붙여진 ‘실패자’, 혹은 ‘루저’들도 이들이 쳐 놓은 게임에서 만들어진 언어에 불과하다. 이 거대한 착시적 현상에서 눈 뜨는 일만이 사는 길이다. 이제는 그만 주저앉아서 처지나 한탄하고 원망하는 일(이것이 그들 신이 바라는 바다)은 끝내야 한다. 깨어나지 않는다면, 세계와 종교를 포함한 집단적 타락과 불평등은 항구한 구조로 정착할 것이다. 눈을 뜨는 일! 그것만이 하느님나라를 앞당기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것을 다 걷어붙이고 예수를 따랐던 바르티매오 신앙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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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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