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9월 16일(연중 제24주일) 이사 50,5-9ㄴ; 야고 2,14-18; 마르 8,27-35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은 예수가 살아 있던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현재 진행형 질문이다. 오늘 봉독되는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진면목이 어떤가를 소개한다. 이사야서는 메시아가 당할 수난을, 야고보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행위를, 마르코는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길을 예고한다. 이 중 어디에도 ‘메시아’의 멋진 후광은 찾아볼 수 없다. 군중들로부터 받았던 장밋빛 칭송과 영광은 잿빛처럼 차갑게 돌아올 것이다. 그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는 자"(이사 50,6)로 서 있다. 그를 변호하는 이조차 없이, 그는 철저히 ‘혼자’다. 이 사실을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는 대열의 말째에서 말째들이 걸어가는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으며, 그에게서 어떤 권력이나 금권, 스펙, 높은 지위, 멋진 아우라는 찾아볼 수 없다. 백번 성경을 뒤집어 털어 봐도 그가 누구와 어울렸는지, 그가 누구에게 열정을 쏟았는지, 그의 첫 일성이 무엇이었는지를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그가 왜, 어떻게, 메시아일 수밖에 없는지, 왜 누구도 그의 메시아성을 조작할 수 없는지, 그를 슬쩍 흉내나 내면서 살아갈 수 없는지에 대한 답변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차례인 것 같다. 나의 정체성은 나의 의지나 확고한 신념, 주장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를 가까이서 따랐던 사도들은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잘못 이해해서 예수의 권능과 후광을 그리스도라 오인했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스펙을 나열한다 해서 그 스펙이 내가 되지 않으며, 나를 감싸는 아우라로 ‘나’를 인정 받는다 해서 실제 그 아우라가 내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정체성은 내 생각이나 주장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입증하려고 애쓸 필요도, 주장할 필요도 없다. 나의 정체성은 오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타자에 의해서 형성되고 유지된다. 타자에 의해서만 비로소 ‘누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 ‘타자’의 얼굴이다.(마태 25,35-37)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그 ‘누구’임, 곧 그의 ‘그리스도’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히고 있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내세운 일이 없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종용하는 이들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응수하였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일을 하러 왔다”, “내 일을 보고 나를 믿어라”.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꾸한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르 11,2-6) 그리고 예수의 말처럼 실제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아본 이들은 이방인들, 사마리아 여인, 수많은 병자들, 악령들린 사람들, 과부, 눈먼 이들, 배제된 자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에 의해 ‘그리스도’가 되었다.

          십자가를 지고 옮기시는 예수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그러니 이제 분명해진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이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질문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며, 이런 사실은 “아버지와 내가 너희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요한 17,23)는 말씀으로 확증된다. 그리고 마침내 야고보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14-17).”

니체도 그의 책 "반 그리스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다른 교도와 구별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하는 것이며, 그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삶의 실천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신적이고’, ‘복되며’, ‘복음적이고’, 언제나 ‘신의 아들’로 알아보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거대한 대제국과 그 비윤리적 행동에 저항한다는 의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비윤리적 사회를 향해 반기를 들고 저항하며 자기 희생적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굴뚝으로, 찬 아스팔트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비극은 그치지 않고 우리 주변을 맴돌며 되살아난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을’들의 삶에서, 죽음의 행진을 이어가는 난민들과 이를 막아서는 자들에게서, 강간과 폭행으로 살해당하는 무수한 아이들과 여성들에게서, 공포와 죽음은 일상이다. 그래서 반 존스가 했던 질문을 다시 되돌려서 묻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구현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란 제비뽑기를 했을 때 내가 누구로, 어떤 세상으로 결정된다 해도 ‘예스!’하고 외칠 수 있는 세상이다. 나(당신)는 사는 곳을 아무 데로 바꿔도 괜찮은가? 예멘, 아프리카,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난다 해도? 혹시 흑인이나 장애인, 미혼모, 여성, 빈민, 하위 노동자로 살아간다 해도 괜찮은가? 만일 위치를 바꿔 살고 싶지 않은 것(곳)이 있다면, 그런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여전히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거고, 그 일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라는 질문은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현재 진행 중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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