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11월 25일(그리스도 왕 대축일) 다니 7,13-14; 묵시 1,5ㄱㄷ-8; 요한 18,33ㄴ-37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후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를 거쳐 전례력 마지막 주일에 안착되기까지 선대 교황들이 각별히 공을 들인 축일로 기억된다. 긴 축일 명명은 독서(다니엘서와 묵시록)와 복음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마치 묵시록의 한 테마를 장엄하게 선포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가 전 세계의 ‘왕’이심을 선포하던 자리는 최소한 축포가 터지고 세계의 사신들이 도열하며, 축제가 벌어졌어야 마땅할 법한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니, 세계는 폐허 더미에서 극도의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인류는 처음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치른 직후였으며, 극단적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확산 일로에 있었던 시기였다. 파시스트와 나치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세계와 교회는 한 치 앞도 구별할 수 없는 격랑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누구도 이후의 10년이 어떤 비극적 파국을 몰고 올지는 더더욱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소수의 난민들(인종청소 등에 내몰린)만이 이 비극적 결말을 내다보고 있었을 뿐.

비오 11세의 회칙 '과스 프리마스'(Quas Primas, 1925)가 발표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교황은 회칙을 통해 난관에 빠진 교권과 세계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대 세력을 막아 내고자 했지만 끝내 제2차 세계대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600만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고, 수십억 인류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내고서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 역시 이 비극의 연장선에서 전쟁을 치러냈으며,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나라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이에 대한 무수한 반성의 논문이 쏟아지고, 정치적 자성도 일어났지만, 그런데도, 이 말도 안 되는 묵시록적 상황은 21세기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다만 지금은 이런 제국주의나 민족주의가 “민주주의”, 혹은 “자국 보호주의” 등의 이름으로 위장만 했을 뿐 제국적 카르텔은 여전히 총성 없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죽는 사람보다 기아와 난민, 테러와 질병, 내전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수십 배에 이른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과 식수난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새로운 (환경)난민, 새로운 민족이동을 가속시키고 있다. 인류 최대의 파국적 위협이 다양한 얼굴로 몰려오고 있다.

다니엘서는 얼핏 하느님이 부재한 어두운 역사를 이어가는 듯하다. 제국들과의 대결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파멸당했으며, 이후 ‘바빌론, 메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이 명멸하며 세계를 지배해 나갔으니까. 예언자를 통해 약속한 ‘메시아의 나라’는 배반당했고, 역사를 장악한 것은 제국들이 섬기는 이방의 신, 제국의 신민들이었으니까. 이스라엘의 신, ‘하느님’은 실로 초라하기만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스라엘의 더 큰 문제는 외세라기보다 이스라엘 내부에 들어앉은 비관론이나 허무주의, 패배주의였다.

예수 그리스도 왕. (이미지 출처 = Pixabay)

다니엘서도, 묵시록도 하느님의 신탁은 이런 시기에 쏟아져 내렸다.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때에,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린 것이다. 역사는 이미 마지막 심판을 넘어섰으며, 거대한 우상이 파괴되고,(다니 2,44-45) 벨사차르는 피살되었으며,(5,24-30) 악의 세력(짐승들)도,(7,11.24-26; 8,23-25) 폭압과 박해도 종지부를 찍었다.(9,27; 11,40-50) 하느님 분노의 날에(묵시 6,17; 16,14) 악마적 세력과 그리스도교 공동체 간의 전쟁은 극에 달하겠지만, 결국 악한 세력들(12,17)과 우상의 지배에 놓였던 모든 민족과 계층들,(18,9-20) 바빌론(14-18장)은 마침내 파괴되고 말 것이다.

심판의 시기에 하느님은 무죄한 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러 주실 것이며,(19,2) 그들이 옳았음을 선언할 것이다.(18,20) 이날에 불의는 낱낱이 드러나고, 하느님나라의 정의만이 우주에 다시 세워질 것이다. 그날 비로소, 굶주림도 목마름도 박해도 슬픔도 사라질 것이다.(7,16-17) 세상에는 오직 하느님과 어린양의 통치만이 남을 것이며,(22,1-5) 그때 온 교회는 자신들의 고통을 함께 지고 죽음의 길을 걸어간 예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그러면 만민은 비로소 고개 숙여 이렇게 화답할 것이다. “당신께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다니 7,14; 묵시 7-8)

20세기 초반에 선포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메시지를, 그 암울했던 시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선포했을 이 축일을, 오늘, 이 엄중한 세기말적 현상 앞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다시 한번 가슴으로 새기고자 한다. 비장한 심정으로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며, 다 같이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그 어머니이신 교회와 함께 말이다. 필시 교회는 오늘 독서와 복음이 이천 년 전 이스라엘이 처했던 상황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암울한 시기에 “하느님의 때”가 여지없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을, 그때, 만민은 머리를 들어 “그분을 영접하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위로’의 제스처가 아니다. 이는 실제로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예언자, 비전가들의 확신에 찬 소리다.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닌가? 특별히 억울한 죽음들, 무죄한 이들의 수난을 기억하고 그들을 민족 앞에 영예로이 세우시겠다는 ‘하느님’의 오랜 약속이 아닌가? 최근에 천주교 열사들과 활동가들을 추모하는 미사가 있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과 함께, 또 수를 셀 수 없는 수많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다시 한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진심으로 경축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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