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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강신숙 수녀] 12월 9일(대림 제2주일) 바룩 5,1-9; 필리 1,4-6.8-11; 루카 3,1-6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등장하는 바룩서, 세례자 요한, 이사야서는 모두 예언적 전통에 근거한다. 물론 다 알다시피 예언자들의 정신은 탈출기에 근원을 둔다. 탈출기에서 광야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이끄는 ‘신 체험’이 이루어진 곳이며,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현장이다. 이후 탈출기는 유배지를 떠돌던 이스라엘에게 줄곧 “회개”의 방향을 가리키는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니 이들이 요청하는 회심의 방향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광야”는 늘 가장 신실하게 하느님을 대면하고 만나는 장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 오늘 세례자 요한도 이런 말로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예언자의 소리는 즉각적이다. 그에게는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다.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뜸을 들이는 일도, 실패할 틈을 없애기 위해 전략을 짜는 일도 없다. 그는 ‘지금, 여기서’, ‘말하고 행동’한다. 예언자들의 특징은 즉각적이나,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적 비전은 항상 현실세계에서 출발해서 현실세계로 되돌아온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이들에게 ‘잘 참고 견디면 훗날 복을 받을 것’이라며 ‘요르단강 저 너머’를 말하지 않는다. 신적 연민이 즉각적인 이유다. 그들이 핑계나 변명의 여지를 두지 않는 이유, 그들의 언사가 거침없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히는 이유도 모두 긴박성과 연민이 나뉠 수 없는 한 몸인 탓이다. ‘이집트’의 억압자로부터 그들을 데리고 나와야 했던 하느님, 그를 움직이게 한 동력의 실체이기도 하다. “나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올라가려고, 여기로 내려온 것이다.”(탈출 3,7-8)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 역시 이렇게 시작되었다.(마르 1,15) 그가 설파한 하느님나라의 도래는 모두 이런 식이다. 그러나 한편,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빌미로 ‘때’를 지연시키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이 말씀은 신중과 합리로 위장한 신학적 명제도, 수수께끼도 아니다. 여기서 때는 “지금이고 모든 것”이라는 소리다. 다만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모두 알고자 하지 않는 ‘통찰무능’이지, ‘통찰불가’가 아니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나라이고, 통치자이며, 그 자신이 현존해 있는데도 결국 사람들은 “그를 몰라보았고, 그를 자기 나라에서 쫓아냈으며, 예언자들처럼 죽이지”(요한 1,9-11) 않았던가. 사람들은 예수의 행동이 공동체의 잘못된 제도와 관계가 망쳐 놓고 있는 파국과 희생자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모른다. 그의 시간이 왜 긴박한 사태에 직면해 있는지, 우선적으로 쏠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리가 왜 위태로운 경계에서 외치는지, 날이 서 있는지, 가차없이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인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 왜 이 길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지를 알려 하지 않는다. 구약의 예언적 전통에서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늘 “당장! 지금!”이라고 외치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그들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루카 21,34) 취해 있었다. “지금, 당장”(루카 21,5-38)이라고 외쳤지만, 인간들은 매번 엇나가기만 했다.(루카 7,32)

광야 (이미지 출처 = Pixabay)

나는 예언자들의 언사를 이스라엘이나 그리스도교에 국한시키는 것이 몹시 유감이다. 그래서 교회는 늘 이것이 종교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저울질하고, 정치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느라 그‘때’를 놓친다. 그래서 예언자의 언사를 아주 협소하게 만들어 “가톨릭의 법(혹은 관습)” 안에다 가두고 안심하며 일을 수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톨릭”이라는 보편성이 교회의 법질서에 갇혀 신적 명령과 행위의 기준이 되면서, 정작 종교에 갇힌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열정도, 동력도 잃어버린, 그저 점잖기만 한 교회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궁금하다.

아무튼 나는 임박한 종말적 태도가 인류에 대한 깊은 연민에 뿌리박고 있음을 상기하고 싶다. 하느님의 연민은 상처받은 개인에 집중하겠지만, 상처 난 개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거대한 시스템과 조직 역시 간과하고 있지 않음을 상기하고 싶다. 구원은, ‘상처 난 개인’은 물론 폭력을 가한 조직, 제도에도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선포한 대로 “신음하는 세상”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자본과 시장”이라는 거대한 바알 앞에서 이젠 그만 위축되어야 한다. 바알을 숭배하는 정치, 경제, 교육현장, 소비문화와 제도 등 일상에 걸친 이교도적 문화에 “아니오”를 외쳐야 한다. 그것이 왜곡된 현실세계, “굽어진 것을 바로 펴는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세례자 요한처럼 외치는 일, 광야에 서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바알의 신당에 피우는 향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그들의 일”과 “우리 종교의 일”을 갈라 친 채 안전한 길만 걷겠는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루카 3,3)한 것도, 특별히 이사야의 말을 인용해서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낮아져야 하며, 굽은 길과 거친 길은 모두 제대로 펴져야 한다.(이사 40,4-5) 어디서든, 누구든, “주님의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나라의 신민이 된 백성들은 고을과 고을을 이어서, 국가와 국가를 이어 축제를 열어야 한다. 소외된 사람들, 열외된 지역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난민, 인종, 피부색, 젠더, 노동자,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화답해야 한다. 그가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다!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바룩 5,1) 이것이 종말적 공동체(교회)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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