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11월 11일(연중 제32주일) 1열왕 17,10-16; 히브 9,24-28; 마르 12,38-44

오늘 성경의 과부 이야기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하느님께 바친 두 과부의 영웅담과 그들이 받은 대가를 칭송하기 위해 꺼내 든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얘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이는 사이비 종교인들이 신도를 갈취하기 위해 쓰는 전형적 수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이런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끔찍이 혐오했다.(마르 12,38-40) 오히려 성경은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킨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우리 각자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와 사회가 어디서부터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엘리야가 믿는 신은 어떤 신이고, 누구를 만나고 싶어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도 일찍이 이 사실을 시인했다. 그는 특별히 이런 말로 이스라엘 사회와 기득권층의 심기를 건드렸다.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지만,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루카 4,25-26)고.

두 과부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특권층에서 벗어난 사람들, 과부 서열에조차 들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아주 특별했던 그녀들을 찾고 만나는 ‘우리 신’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하고, 늙고 병든 남자와 여자가 인간 사회에서 ‘쓸모(?)’없긴 마찬가지겠지만, ‘여자’는, 더구나 남자 없이 살아가는 ‘과부’는 더 효용가치가 없었다. 물론 여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벌인 역사적 투쟁은 기껏 한 세기도 채 안 되지만 말이다. 그러니 수천 년 전 기근과 가난에 시달리던 가난한 과부들의 이야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당시 그녀들은 가족이든 공동체든 대놓고 존재감을 상실한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자신이 다른 이들처럼 ‘사람’이라는 것,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동기와 원의를 지니고 있으며, 마지막 여생을 제대로 보내고 싶어 하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 살았다. 그녀들 처지는 마치 사렙다 과부가 마지막 불쏘시개로 쓰려던 ‘장작’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자기 삶을 그렇게 태우고 마감하려 했지만 엘리야의 신이 그녀를 그렇게 버려두지 않았다.(1열왕 17,12-16) 그녀는 자신이 끝내려던 마지막 빵을 낯선 이방인(의 신)에게 건넴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고, 마침내 하느님의 결정적 시간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오늘, 이 시대처럼 ‘사람’이 광범위하게, 또 철저히 ‘유용성’과 연결되었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우린 계속 겉으로는 ‘이들(쓸모없어진 부류들)도 사람’이라고 외치겠지만, 그 비용을 치르는 시점이 오면 얘기는 달라진다. 눈앞에 놓인 손익계산이 먼저인 까닭이다. 어느 집단에서든, 친혈육을 포함해서, 경제적 가치가 없어진 사람은 이중, 삼중으로 상처받기 마련이다. 그들이 누구가 되었든 무익한 자로 내몰린다는 것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최적화된 사회에서는 더는 살아갈 명분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상의 ‘사형선고’와 같다. 그래서 실은 가난하고, 늙고, 병들고, 장애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젊고, 건강”한 효용가치가 없어졌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런 식의 ‘자기소멸’은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불행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회에 ‘두려움’이라는 병을 퍼뜨리기 때문이다.

'과부의 헌금', 요제프 단하우서.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엘리야와 예수의 하느님은 이런 공동체와 사회 한가운데로 등장했다. 그는 공동체가, 세상이 무엇을 내다 버렸는지를 다시 보게 만든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하필 이방의 과부를 찾은 것도, 수많은 부자가 헌금궤에 돈을 넣지만,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의 가치를 포착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그들은 함부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함부로 두드리는 계산기로 다뤄져야 할 사람들도 아닌 것이다. 그들의 특별함은 모든 바닥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운다. 두 과부는 그저 무기력하지 않았으며, 주눅들지 않았고, 사람들이 가둔 틀에 갇혀 있지도 않았다. 그녀들은 자기 삶에서 무엇이 우선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굶주리고 지친 이방인, 자신의 집을 침입해 들어온 낯선 자에게, 자신의 수중에 남은 마지막 물과 빵(두 개의 렙톤)을 내 줄 만큼(1열왕 17,12-15; 마르 12,42) 용기 있고 담대했다.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들이 ‘불쌍한 틀’에 갇혀 지내길 원치 않는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들을 수혜적 존재로 가둔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기회를 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불행을 존속시키는 선심적 자선은 옳지 않다. 이런 가짜 행위에 취해서,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생산해 내서는 안 된다. ‘자선’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방식은 ‘가진 자(우월)’와 ‘갖지 못한 자(열등)’의 도식을 굳히는 가장 나쁜 선례로 끝날 것이다. 엘리야의 신은 선심적 존재자로서 ‘불쌍한 과부’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그런 체가 아니다!) 목마르고 굶주린 나그네로, 폭력적 권력에 쫓기는 신세로, 가난한 이들 중 한 사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제 이들 사이에 우월적 위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죽음’에 직면한 운명 공동체로 마주 서 있다. 여기에 어떤 위선이나 기만, 적대감이나 경쟁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고단하고 힘겹다. 사회 안에서 이권투쟁으로 약자를 볼모로 삼는 일은 수없이 많고 이를 막는 조직들이나 제도에 대한 변화는 너무 더디다. 최근 주교회의에서 선정한 “농어촌 이주노동자”든, 난민들이든, 우리 사회를 겉도는 수많은 이들이 ‘불쌍한 약자’로만 취급되지 않길 바란다. 그들이 정당한 권리로, 제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더 우선인 때문이다. 하느님이 바라는 바는, 누구도 분리나 배제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한 공동체에 기대서 편히 살 수 있는 세상,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하느님은, 예수는 두 과부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과 이런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이것이 오늘 ‘과부’를 찾아온 하느님의 진짜 이유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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