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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더는 ‘슬픈 부자’가 없길 바라며[강신숙 수녀] 10월 14일(연중 제28주일) 지혜 7,7-11; 히브 4,12-13; 마르 10,17-30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지구상에 등장할 때부터 지혜와 탐욕은 함께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에 첫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선하기도 했고, 탐욕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성경은 첫 사람들을 통해 이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왜’,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의 거처(에덴)에서 추방되었을까? 뱀은 금지된,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로 첫 사람들을 데려갔고, 거기서 ‘금단의 열매’를 다시 바라보도록 유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창세 3,5)라는 말로 꼬드겼던 것이다. 처음부터 뱀이 숨긴 것은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진실이었다. 그는 ‘거짓말’로 탐욕을 부추겼고, 탐욕은 ‘파괴’로 끝장났다. 사람이 쳐다보니 그 열매는 “(하느님만큼)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을 따 먹었다.”(창세 3,6) 이후 이어진 인류사에서 사람의 지혜와 뒤섞인 욕망은 줄곧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느님의 지혜는 사람이 동산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어울려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으나, ‘조화’를 다룰 줄 몰랐던 사람의 지혜는 욕망과 결탁해 동산의 모든 관계를 파괴했다.

첫 사람에 관한 이 이야기는 단지 ‘악의 기원’이나 ‘인간의 타락과 추방’만을 다루지 않는다. 호모(인간)의 ‘사피엔스'(지혜)가 한편 어떤 얼굴(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아니, ‘사피엔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간파한 탓이다. 지혜는 저 홀로 독야청청 빛나는 이데아가 아니다. 지혜는 현상적 세계가 내미는 ‘먹음직스러운’ 것들 앞에서 상한 것을 가려내는 경계음이며, 세계에 져야 할 자신의 책무를 무책임하게 떠넘기는 핑계를 용납하지 않는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저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는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지혜 7,8-10) 그 지혜의 광채가 어떤 것인지는 예수를 통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17-21) 이것이 지혜의 결정판이다. 지혜는 숨긴 것을 드러내고 왜곡된 것을 바로 편다. 가난한 이들이 처한 억압적 상황과 차별, 폭력, 전쟁, 불평등한 세계, 망가진 생태계를 바로 세우는 일을 지향한다.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파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에로 이르는 길이며, 이것을 위해 일하는 것이 지혜의 본성이다. 다시 처음 하느님의 거처(에덴)를 되돌려 놓는 것,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탐욕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새드 엔딩’으로 끝나고 말았다. 청년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 슬퍼하며 떠나갔고, 예수는 더 혹독한 못질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10,25) 지혜와 탐욕은 나란히 갈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과 맘몬이 어떻게 같은 방을 쓸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사랑한다면서 끊임없는 폭력과 구타를 밥 먹듯이 하는 ‘당신’을 견딜 수 있는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난한 이들(국가)의 호주머니를 털면서 ‘OECD’, ‘GDP’, ‘GNP’의 최고 순위를 매겨 문명국가인 양하는 위선과 탐욕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내는 통계는 절대 ‘부의 배분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더구나 ‘GNP'(국민총생산)의 통계는 전체 부의 증가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병행한다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 

18세기, 애덤 스미스는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르는데, 큰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불행히도 그의 주장은 21세기 초엽 상상할 수 없는 수치로 늘어났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현재 최상위 부자 1퍼센트가 전 세계 자산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상위 10퍼센트 부자가 전 세계 부의 8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하위 50퍼센트는 전 세계 부의 겨우 1퍼센트”만 차지하고 있다니, 이처럼 상상할 수 없는 불평등은 생태계 재앙에서도 고스란히 같은 조건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어찌 지나치다 할 수 있는가? 말은 똑바로 하자. 하느님나라가 부자(시스템)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부자(시스템)들이 하느님나라를 망가뜨리고 있음을.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부자되기’를 ‘가장 먹음직스러운 1순위’로 꼽아 왔다. ‘부자 되시라’는 인사가 덕담으로 등장한 지도 오래다. 이젠 아무도 대놓고 부자를 건드리는 일은 없다. 마치 부자에 대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제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처럼, ‘부자’는 경건하게 우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부자’라는 말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주눅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오늘의 복음은 더 당당하고, 더 단호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특히 ‘자본’의 망령에 사로잡힌 지구촌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히브 4,12)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우리의 민낯이 죽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밝혀내야 할 진실을 외면할 순 없다. “지속 가능한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 이들이 휘젓고 다니는 피의 자양분이 어디서, 누구로부터 수혈되고 있는지를.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으며,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히브 4,13) 있으니 더는 위장된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막아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가 할 일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쉽사리 맘몬의 위세에 눌려 전투력을 상실할 수 없다. 뱀의 시선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러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냐고? “맘몬의 세계를 동경하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하겠지만, 맘몬의 허상을 간파하고 전열을 갖추는, 지혜로운 자들에게 불가능은 없다.”(참조: 마르 10,26-27) 이 땅에 더는 슬픈 부자가 없길 바란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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