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0월 29일(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마태오 복음 22장의 메시지의 정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서로 갈라질 수 없다는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한 가지 사랑 혹은 두 가지 사랑?

예수님은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에게(마태 22,37-40)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 두 가지 근본적 차원들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 두 계명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왜곡되게 해석함으로써 야기되는 교회 내의 긴장, 갈등들을 경험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이웃과의 관계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그리고 진짜로 중요한 것에 그냥 덧붙여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한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속에서 결단을 내리는 것의 중요성이라든가, 성경이 고아들, 과부들과 이방인들이라고 칭하는,(탈출 22,20-26) 가난한 이들 전반의 요구들에 관한 투신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다른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주로 타인에 대한 투신과 연대로 표현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관점은 신자들에게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기도, 기념,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 맛들이기,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는 은총과 감사의 세계에서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하는 것 등의 충만한 의미를 잃게 되고, 우리 삶에 미치는 그것들의 영향력이 감소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두 가지 사랑 중 한 가지만 가지려고 한다면, 두 가지 사랑 모두를 잃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추구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성경의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하느님을 찾는다면, 그들은 실존의 원동력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무상의 은총이란 우리와 하느님과의 만남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서로 상호간의 만남 속에서도 얻어지는 것이다.

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미지 출처 = Pixabay)

가난한 이들은 어디에서 자게 될 것인가?

이론으로 이 두 가지 계명을 화해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 문제는 언제나 실행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탈출기는 이 사실을 우리가 직면하도록 도와주는데, 그것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통해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탈출 22,25-26)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같은 것인가? 우리는 우리나라의 가난한 이들이 무엇을 입을 것이며, 어디에서 밤을 보낼 것인지 구체적으로 관심을 두는가? 그들은 머리 누일 지붕이 있을까? 그들은 마루나 침낭, 혹은 침대에서 잘 것인가? 그들은 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곧 쫓겨날 땅에 있는가? 오늘날 페루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질문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두 개의 사랑이 섞이는 곳은 바로 현실에서다. 가난한 이들이 어디에서 잘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느님께 중요한 것이다: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탈출 22,26) 살아 계시고 참다운 하느님을 믿는 것은(1테살 1,9) 또한 우리를 연민으로 충만하도록 이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느끼는 것”은 점차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이끌 것이다.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구절의 인용은(마태 22,39) “너 자신”과 “너의 가족”을 동일시하는 히브리식의 표현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마치 이웃들을 우리 가족처럼, 그들이 우리의 가족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랑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 국가의 백성들이 이방인(이국인)들을 마치 자기 나라에 속한 사람들처럼 환영하라는 요구요, 초대다.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우리 자신의 가족처럼 사랑받아야 한다. 그들이 집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사는 길이다. 사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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