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0월 8일(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의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을 계속 읽어 왔고, 이제 마지막 비유들에 이르렀다.

하느님 나라의 열매들

마태오 복음서의 이 비유는 살인자 소작인들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비유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포도밭에 관해 말하고 있다. 포도밭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즉 소작인들은 그들이 일한 소출을 걷어오라고 주인이 보낸 사자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가한다.(마태 21,35)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소출, 열매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비유의 의미에 관한 핵심 질문이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인용되는 이사야서 구절들은 우리가 적절한 대답을 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포도밭의 노래에서 이사야는 심어진 포도나무(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로부터 주님이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을 보았고,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을 들었다”(이사 5,7)고 말한다.

정의와 공정의 건설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중요한 명령들 중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정의와 공정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들 사이의 계약에 충실함을 표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정의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의 권리가 존중되기를 원하신다.

이것들이 주님께서 심었고, 보살폈던 포도밭의 열매들이다. 포도밭은 이런 열매들을 반드시 맺어야 한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불의와 살인

이것이 우리가 읽고 있는 비유의 정수이다. 소작인들은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고, 공정을 세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작인들은 살인을 저질렀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과 강탈에 대하여 불평이 있어 왔다.

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은 살인 행위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소작인들이 그들의 일상 행동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대해 보이는 똑같은 경멸을 주님이 보낸 사람들에게 보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처럼 소작인들은 단순히 주님이 보낸 사자들과 아들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권리에 손상을 끼치기 때문에도 살인자들인 것이다. 소작인들은 주님께서 요구하는 정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순간부터 살인자들이 되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런 표현은 강력한 선언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본권, 의식주의 권리가 결핍된 상황을 보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마태 21,42-43)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일상생활에서 이 살인적인 소작인들과 비슷한 사람들과 공범 관계에 있지 않은지 물어보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정의와 공정이 세워진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우리의 열매는 무엇인가?

몇 장 뒤에 마태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을 먹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며, 가난한 이들과 그리스도에게 죽음을 판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요구이며, 우리가 이를 실천한다면 평화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필리 4,6-9)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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