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9월 15일(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성경에서 잔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을 표현하는 데에 자주 쓰이는 표상이다. 이 잔치에서 하느님은 그분 자신을 자유롭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신다.

하느님은 무상으로 가난한 이들을 선호하신다

잔치 이야기에서 마태오는 두 개의 비유들을 나란히 놓는 것 같다. 그것은 손님들의 비유와 결혼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비유다. 의심할 바 없이, 두 개의 비유는 하느님나라에 초대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랫동안, 비유 속에 등장하는 자격 없는 손님들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일관되고 더 나은 해석이 있다. 그것은 사회적 위치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도 특권을 누리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자격 없는 손님들로 여기는 해석이다. 그들은 “농장”이나 “기업들”이나 이윤을 하느님나라에 대한 초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종들을 학대하는 사람들이다. 분명히 “초대된 사람들은 자격이 없다.”(마태 22,8)

하느님나라의 초대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며, 항상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초대를 받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곳에서(사회적으로 다른 곳) 찾아야 한다: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초대하여라.”(마태 22,9) 길거리는 집이 없는 사람들,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 혹은 도시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무지하고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같은 비유를 말하는 구절에서 루카는 마태오보다 더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한다: “가난한 사람들,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21)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신원에 대해 묻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이 보냈던 사람들에게 응답한 것처럼, 구원의 은총을 받는 현실 역사 속의 사람들이다. 마태오는 또한 덧붙이기를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마태 22,10)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그들의 업적 때문에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꼴찌들,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상의 선하심 때문에 초대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이 하느님의 은총은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을 잔치와 하느님나라의 특권받은 손님들로 변화시킨다. 꼴찌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은 우리들을 초대받지 않은 이들과 같은 식탁에 앉는 손님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하느님나라, 잔치의 초대는 항상 열려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희망과 결단 속에서 기다리기

마태오 복음에서(루카의 구절과 다르다) 비유는 또 다른 주제로 연결된다. 어떤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나타났다. 하느님나라에 초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복의 상징이 말하는 어떤 실제적 행동을 요구한다.(마태 22,11)

이사야의 예언이 약속하는 것처럼, 하느님나라의 모습은 충만함과 기쁨의 원천인 우리와 하느님의 구원적 일치로 구성된다: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이사 25,9) 이것이 죽음과 눈물에 대한 결정적 승리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구원의 희망은 모든 다른 선의 가치를 상대화시킨다. 이것이 “적게 가지면서도 많이 가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고,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 많이 가지거나 모자랄 때 등 어떤 상황에서도(필리 4,12) 살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바오로의 체험이다. 종말론적인 희망은 생명력 있고, 결단을 내리는 희망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약속을 미리 역사 속에서 예견할 수 있는 실제로 변화시키고 그것도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필리 4,13)는 근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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