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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을 추모하며[시사비평 - 조현철] 2018년 성탄 추모미사 강론

2016년 ‘구의역 김군’ 사고는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졌고 광장의 수많은 촛불이 부패하고 무능하고 사악한 정권을 내렸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희망을 품고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장 억압을 받았던 노동자들도 앞날의 변화에 대한 기대로 설레었습니다. 2017년 5월 12일, 취임 첫 행보로 인천공항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그곳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1년 반이 지나도 실체적 변화는 없었고, 감동과 설렘은 배신과 환멸로 바뀌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문 대통령에게 몇 차례나 대화를 요청했지만, 청와대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청와대를 찾은 노동자들을 기다린 건 경찰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2월 11일 새벽,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입사 3달도 안 된 24살 노동자 김용균이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하다 기계에 몸이 끼어 참혹하게 사망했습니다. 비정규직의 처지와 운명은 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나 아직 똑같습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성탄입니다. 이렇게 기쁜 날까지 세상의 험한 모습을 상기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화와 성탄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바로 이 세상,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온 사건입니다.(요한 1,14 참조) 우리의 신앙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은 ‘진짜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그래서 육화와 성탄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 신앙의 주요 원리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원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대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 세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환상에 기초한 신앙, 공허한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성탄인 오늘, 우리는 더더욱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비정규직’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핵심어입니다. 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름 자체는 비정규직의 실체와 본질을 잘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춥니다. 비정규직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 준 것은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청 노동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강요당하는 노동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1년 산재 사망사고의 90퍼센트 이상이 하청노동자입니다. ‘구의역 김군’과 태안의 김용균 모두가 유품으로 남긴 컵라면은 하청노동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노동이라고 고발합니다. “이동 동선과 시간대를 따져 보면” 김용균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경찰의 말은 하청노동이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노예노동이라고 폭로합니다. 비정규직은 노동자를 이렇게 부려 먹고도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 불의한 제도, 노동자의 인격과 자존감을 갉아먹는 사회적 암 같은 제도입니다.

25일 광화문 광장에서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 씨를 추모하는 미사가 열렸다. ⓒ김수나 기자

예수님 당시 유대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유대 백성들은 억압과 폭력의 시대를 몸으로 받아 내야 했습니다. 루카 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2,1-20)에 나오는 “호적 등록”은 인구조사였고, 인구조사의 목적은 제국의 재정을 위해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삭의 마리아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길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고, 거기서 아기 예수를 낳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리”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머물 자리, 일할 자리. 자리가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구유는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라 머물 자리가 없이 밀려난 사람들의 최후의 생존의 보루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밀리면 정말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죽음입니다.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 아기로 구유에 놓인 것은 세상에서 삶의 자리가 없이 내몰린 사람들 한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은 우선적으로 세상의 약자들, 자신의 자리가 없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은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은 풍요롭고 호화로운 자리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깥에 자면서 야간 노동까지 해야 하는 처지라, 당연히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그래서 사회에서 천시받고, 배척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도 번듯한 삶의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리가 없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의 아기가 “주 그리스도”라는 말이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소식을 듣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냅니다.

강생과 성탄의 기쁜 소식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탄의 소식을 제대로 들으려면 오늘 자신의 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들과 어떤 식으로든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태안을 비롯한 화력발전소에는 일할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든다고 합니다. 하청노동자가 되어 ‘막장’으로 들어섭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음의 외주화라는 멍에를 뒤집어씁니다. 그리고 오늘 분명, 하느님은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힘 있는 사람이 아닌 “아기”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정말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아기’라는 상태를 우회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아기는 무력합니다. 자기를 추스릴 힘이 전혀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아기는 자신의 무력함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듭니다. 아기는 울음으로, 웃음으로, 보챔으로, 쌔근쌔근 자는 잠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청합니다. 아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 그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무력함이 우리를 움직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일단 움직이면, 그 움직임은 전염이 되어, 아기를 지켜 줄 든든한 벽이 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들을 통해 일하는 방식입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위험한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에게, 숨진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어머니가 먼저 나섰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만난 자식 또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껴안아 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너희들, 여기서 어서 나가라. 여기는 살인병기 같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계속 일하면 너희들도 죽는다.” 이후 여러 차례 진상규명은 물론이지만 비정규직을 없앴으면 좋겠다. 이런 살인적인 노동 조건이 가능한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는 데 힘이 되겠다는 취지의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자신도 비정규직 노동자인 이 엄마의 힘겨운 움직임이 고요하지만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엄마를 통해 일하는 방식입니다.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의 외로운 죽음이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는 구의역의 김군, 태안의 김용균이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자리가 없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람이 없도록 힘을 모아 사회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윤보다 생명이, 효율보다 안전이,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유에 누여져 우리를 바라보는 아기 예수의 요청을 제대로 알아듣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에겐 자리가 있는가? 자리가 있다면, 나는 자리가 없어서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들과 기꺼이 그 자리를 나눌 마음이 있는가? 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자리마저 빼앗아가는 제도, 야만과 폭력의 제도에 함께 항의하고 저항할 마음이 있는가? 여기에 “그렇다!”라는 응답을 할 때, 우리는 성탄의 소식을 제대로 알아듣고, 진정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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