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1월 6일(주님 공현 대축일) 이사60,1-6; 사도3,2.3ㄴ.5-6; 마태2,1-12

주님의 공현(Epifania) 대축일이다. 구유에 삼왕을 모실 즈음이면 이제 축제가 끝나감을 예감하게 된다. 나에게 공현 축일은 이렇게 징검다리 같은 축일이었다. 물론 수녀원 안에서는 1년에 한 번 성대한 삼왕공연식이 벌어진다. 절대 ‘징검다리’일 수 없는 축하연과 삼왕극이 벌어지고, 1년에 한 번 세 왕들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선물로 받는 기쁨도 누린다. 삼왕은 딱 한 번 수도회 안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어 꽉 막힌 수도회 규율 하나를 깨고 은전을 베푼다. 최고 장상도 이때는 삼왕이 베푸는 은전에 순명해야 한다. 수도회 안에 있어 온 이 오랜 전통은 여러 가지로 ‘별’과 ‘삼왕’과 ‘아기 예수’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경축한다. 매우 창의적인 ‘주님 공현’을 기념하는 셈이다.

‘별’을 따라 먼 여정을 떠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는 무모하리만큼 아름답다. 그들은 지금의 이란이나 아랍, 혹은 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로 추정된다. 별은 사실 밤낮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긴긴 낮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확신과 의혹만큼 인내의 깊이도 더했으리라. 그 별이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멈추어 서고, 박사들은 수소문 끝에 한 집을 발견한다. 천신만고 끝에 얻어진 기쁨의 크기가 어떠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박사들은 준비해 온 예물을 아기에게 바치고 경배한 뒤 천사들이 일러 준 대로 제 갈 길을 떠났다. ‘주님의 공현 축일’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하게 끝난다. 그러나 이 짤막한 공현 이야기의 진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간단한 이야기는 사실 전혀 간단치 않은 이야기인 것이다. 

얼핏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이 짧은 에피소드들은 차라리 없는만 못하다. 세밑에 일어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과 그를 겪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어느 날 내 차례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예수는, 이 축일들은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축일은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 겪을 일이 없는 사람들의 축제인 것이다. ‘예수’를 둘러싼 교회의 떠들석한 축제들은 왜 세상의 고통과 슬픔, 희망과 어긋나기만 할까? 왜 교회의 예수는 자꾸 세상의 밑바닥 인생들과 상관없는 복음을 노래할까? 교회가 수사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언급할 때마다 왜 모욕당하는 기분이 들까?

예수강생은 ‘하늘을 찢고’, 인류의 역사를 찢고 침입해 들어온 일대의 ‘사건’이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태어난 한 아기의 신비를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사건은 전혀 고요하지도, 정적이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다. 나의 익숙한 세계, 안정적인 질서를 뒤흔들어 놓고, 온 힘을 바쳐 추구하고 구축해 온 세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죄 없는 이들의 가혹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멀쩡한 정신이면 그게 외려 이상한 일 아닌가. 예수강생은 충돌하는 세계 속에서 느닷없이 무방비적으로 일어났다. 절차에 따라 주어진 답대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것이다. 우리 인류가 준비되어서 온 것도, 베들레헴과 이스라엘이 예수를 받아들일 만해서 일어난 약속의 실현도 아니다. 하느님은 다만 ‘예고’했을 뿐 어느 것도 지정해 준 일이 없다. 인간들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질서와 안전지대, 잠금장치를 부수고 이루어진 강생인 것이다. 

동방박사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 ‘이루어짐’이 공격적인 것은 주도권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이고, 인간은 다만 수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다만 압도당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 이사야의 예언이 왜 역동적이고 기쁜 일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가 누구 편에서, 어떤 식으로 일어날 것인지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이사 60,1-2)

예수강생은 이렇게 일어나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마치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광야에서 마주친 천둥 번개처럼 전 존재가 뒤집혀지는 일생일대의 사건인 것이다.(사도 9,3-8) 아직도 예수강생을 구유나 동방박사 이야기에 고정시키고 있다면 예수의 전 생애를 다시, 다른 방법으로 읽기를 권한다. 예수의 탄생, 공현 축일 이야기는 예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거쳐 가야만 비로소 마지막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야기인 탓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거꾸로 읽는 이야기, 거꾸로 읽어야만 “예수탄생”이 보이는 이야기다. 우리 방식대로 읽는다면 우리는 영영 이 이야기가 갖는 강렬함을 놓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예수’라는 인물을 만나 보지도 못한 채, 빈 구유와 마구간에서 존재치 않는 아기 예수를 경배할지도 모른다.

‘별’을 따르는 여정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는 충격이며, 사로잡힘이고, 수많은 질문을 일으키게 하는 어떤 것이다. 나를 조용히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고,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걸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별을 따라 나서는 일은 필연적으로 낡은 세계와 작별하는 긴 여정일 수밖에 없다. 바른 정답(?)대로 살기를 강요하는 세계, ‘북소리에 맞춰 행진해 가는 수많은 무리’와 결별하고 거꾸로 걷겠다는 것이다. 동방박사가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천문학적 지식의 경륜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할 권리는 현실적 권력의 지배자 헤로데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마태 2,4-7)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하겠지만, 별을 따라온 이들은 타협 없이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이 글을 적어 내려가는 잠깐 새에 세 개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굴뚝으로 가는 희망버스”, “스물네 살 비정규직 고 김용균 추모제”, “천호동 화재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가 연일 이어진다는 소식이다. “평등, 공정, 정의, ‘김군들’에겐 없었다”, 화재로 목숨을 잃은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대자보에는 “자유롭게 날아올라”, 이런 부제가 적혀 있다. 오늘은 수은주가 영하 10도 밑으로 뚝 떨어진다고 하고, 겨울바람도 점점 더 매서워진다고 한다. 목동 굴뚝농성장(지난 성탄절 이들은 고공농성 409일 세계최장기록을 세웠다!)에, 광화문에, 천호동 화재현장에 베들레헴의 별이 멈춰 서 있다. 부디 이곳에서 예수의 진모습을 만나 보시라!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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