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시사비평
‘자유롭게 날아올라’: 천호동 화재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시사비평 - 조현철]

길거리를 다닐 때, 좌판을 펼쳐 놓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이 가는 편입니다. 대개는 할머니들입니다. 주로 그분들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깊은 주름이 잡힌 얼굴을 보면 숙연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 얼굴에 한 사람의 삶과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얼굴이 그 사람의 삶을 제게 말해 줍니다. 그 사람의 입성이나 품성은 여기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좌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는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노인들, 수많은 얼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뿐인 바로 이 사람, 이 얼굴이 됩니다. 혹시 좌판에서 뭘 산다고 하면, 말을 붙이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규정이나 정책은 이런 만남과는 판이합니다. 불가피한 면이 없진 않겠지만, 규정과 정책은 대개 사람에게서 구체성을 제거하여 일반화하고 추상화해서 만들어집니다. “좌판이나 좌판을 벌이는 사람은 이러이러하다. 그러니 이렇게 해야 한다.” “낙태나 낙태를 하는 사람은 이러이러하다. 그러니 이렇게 해야 한다.” “성매매나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러이러하다. 그러니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구체적인 ‘이 사람’, ‘저 사람’은 없어집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없어지고,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들만 남습니다.

낙태. 뱃속의 생명체를 가장 아끼는 사람은 누구일까? 대부분의 경우, 낙태를 결심한 그 여인이 아닐까. 성매매. 누가 자신의 몸을 매매의 대상으로 내놓고 싶을까? 자기 몸을 가장 아끼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아닌가. 그래서 성매매는 자발적 선택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 강요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빈곤으로 인해서, 상당수가 아주 일찍, 미성년 때부터 성매매를 시작합니다. 일단 시작을 했어도, 그만두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말하기 힘든, 고유한 삶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앞에서 누가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획일적이고 관료적 사고와 접근 방식에서는 이런 이야기와 사연들, 각자의 고유한 맥락과 역사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규정과 정책은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힘 있는 사람들은 비껴가기 일쑤입니다.

하느님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십니다. 출애굽. 하느님은 이집트 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파라오를 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백성이 겪는 고통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큰 스캔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억압, 거기서 생기는 고통과 울부짖음입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어떤 지표나 통계 숫자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12월 22일 오전 11시 4분 천호동, 이곳 건물 1층에서 불이 났습니다. 16분 만인 11시 20분에 비교적 신속하게 진화되었지만, 2층에서 자던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태에 빠지는 인명 피해가 일어났습니다. 2층은 여성 합숙소로 방 6개와 화장실 1개가 빼꼭히 들어차 있었는데, 밖으로 향하는 원래의 큰 창문은 시멘트로 막아 버렸고, 조그만 창에는 쇠창살이 설치되어 탈출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강제는 아니었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런 폐쇄된 구조물에서 고단한 몸과 마음을 이어 왔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 또한 하느님이 가장 관심을 많이 기울인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지난 30일 천호동 화재 현장에서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가 열렸다. ⓒ신재용 기자

이번 화재의 희생자들의 삶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 어두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번 화재를 “국가와 사회가 방치한 성 착취의 공간에서 일어난 예정된 비극”으로 규정했습니다. 지난 11일 새벽, 태안화력발전소에서 24살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밤에 홀로 일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끼어 처참하게 사망했습니다. 이 죽음은 어떤 특정한 의도로 “국가와 사회가 방치한” 제도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방치했을 때,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가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그렇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에게 죽음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이른바 ‘죽음의 외주화’입니다. 김용균의 죽음 이후에도 벌써 3명의 사망 사고가 더 일어났습니다. 이 제도를 유지하고 방치하는 의도는 돈입니다.

그러니 천호동 화재사건과 태안화력발전소 사건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근본 성격은 아주 닮았습니다. 어떤 면에선, 천호동의 죽음이 더 딱하고 비참할지 모릅니다. 삶의 성격상, 드러내 놓고 항의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쉬하는 가운데, 여기서도 참극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2002년, 군산 유흥주점 화재로 14명의 여성이 2층 철문 계단 앞에서 질식사했습니다. 2005년, 미아리 성매매 집결지의 화재로 5명이 숨졌습니다. 이중창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도 막힌 건물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이번에는 대책위가 요구하듯이 철저한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대책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듯이 이곳에서도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기리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서 존중받습니다. 천호동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을 매매의 대상으로 보는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관심과 따뜻함이 있는 가정이 아니었을까.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 타자는 우리에게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사람의 얼굴이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나도 사람이다.” 그럴 때, 우리는 타자를 ‘사람 일반’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호소합니다. 그 호소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타자를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도 그만큼 ‘더욱’ 사람이 됩니다. 우리 사회가 한 사람의 얼굴, 거기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할 때, 사람이 먼저인 사회가 될 것입니다.

25년 동안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가 운영하는 여성인권상담소 ‘소냐의 집’이 이곳의 여성들과 함께해 오고 있습니다. ‘소냐’는 외국 이름이지만 우리에게도 상당히 친숙합니다. 소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감화시킨 성매매 여성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한편, 소냐는 소피아의 애칭, 줄임말입니다. 성서에서는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와 말씀인 로고스는 밀접한 관계로 함께 사용됩니다. 이 말씀인 지혜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요한 1,14 참조) 강생과 성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듯이, 이 말씀과 지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하십니다. 소냐의 집이 그래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찾으면서도 멸시하는, 사람 대접 못 받는 이곳 사람들에게 따뜻한 안식처, 가정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지혜의 인도로 선한 지향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JPIC양성학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