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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없는 잉태’를 다시 생각하다[특별기고 - 조현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요셉 성인과 함께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그만큼 우리 교회에 중요한 분이지만, 정작 ‘원죄 없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호하기만 하다. 예전에 사용하던 ‘무염시태’라는 용어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이라는 인상만 줄 뿐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대축일의 전례 독서에는 대조적인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바로 아담과 하와(창세 3,9-15.20) 그리고 루카 복음의 처녀 마리아(루카 1,26-38)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대표한다. 심지어 하느님의 당부도 이들의 호기심과 욕구를 막지 못한다. 이들은 인간에게 어떤 근원적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거부한다. 기회만 된다면,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 기꺼이 신의 반열에 오르겠다고 생각한다.

처녀 마리아는 이와는 아주 대조적인 태도를 지녔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에 이성에 기초한 지극히 합리적인 질문을 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성령’의 힘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천사의 답변은 이성적으로 보면 여전히 납득할 수 없지만, 마리아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 준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있다. 아니, 많이 있다.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천사의 대답은 우리의 한계, 알 수 없음과 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

마리아는 천사의 답변을 받아들였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알 수 없고 할 수 없지만 하느님에게만은 가능한 그런 것이 있다. 세상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아담과 하와는 이 사실을 거부했고, 마리아는 수용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근대 이후, 긍정적 태도로 인정되고 권장된 것은 물론 아담과 하와의 태도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 지금 못 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할 수 있다. 진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덕분에 인간의 능력은 급신장했고,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보면, 한계의 부정과 극복으로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풍요롭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 쌓여 가는 플라스틱을 비롯한 각종 쓰레기, 핵발전소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고준위 핵폐기물, 미세먼지,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위기.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정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발전의 열매고, 진보의 작품이다.

오늘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호기심을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한스 요나스(Jonas)의 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알 수 있다고 다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다 해야 하는가? 인간 능력이 초래하는 파괴적 결과를 보면서, 이제는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식, 지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이 새롭게 부각된다. 마리아의 겸손한 태도는 삶을 메마르게 하지도, 초라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마리아의 태도는 하느님의 계획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해 준다. 삶은 놀라운 것, 경이로운 것, 희망찬 것으로 변화된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삶이 펼쳐진다. 

알 수 없는 영역, 넘어서지 말아야 할 영역을 인정한다고, 우리의 삶이 쪼그라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에 열리면서 경이로운 사건이 된다. 처녀 마리아에게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하느님의 ‘강생’과 ‘육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성과 자유의지를 무력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이것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육화와 같은 놀라운 사건은 바로 우리의 한계, 무력함을 고백하고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모님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임이 분명하다. 한편, 원죄가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알 수 없음과 할 수 없음을 부정하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는 인간의 성향을 뜻한다면, 성모님의 원죄 없음은 인간의 근본 조건에 대한 겸허한 인정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와 연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원죄 없음은 그 옛날 성모님만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는 하느님의 초대로 읽을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한편, 우리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라는 초대인 것이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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